일상다반사

숫자로 만들어진 운명

요긴소프트 2026. 3. 1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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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로 만들어진 운명

**— 어느 기억 설계자의 마지막 항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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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이라는 미래

나는 어제도 오늘을 궁금해했다.

그것이 이상한 일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내일이 어떤 얼굴을 하고 올지 밤새 그려보다가, 막상 그 내일이 오늘이 되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미묘하게, 혹은 아주 크게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궁금증은 풀렸지만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그 차이가 실망이 될 수도 있고, 안도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또 다른 내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서준은 서울역 앞 카페 창가에 앉아 빗속의 택시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있었고, 열린 노트북 화면에는 여섯 달째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고서의 첫 줄이 깜박이고 있었다.

*뇌 에뮬레이션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예비 보고서.*

첫 줄.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마흔두 살이었고, 신경과학과 철학의 경계 어딘가에 놓인 분야에서 일했다. 정확히는 '인지 연속성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었는데, 그 직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서준 본인을 포함해서 세상에 많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가 "뇌 관련 일을 한다"고 친척들에게 설명했고, 서준은 그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 그가 서울역에 온 것은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제주도행.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막연한 충동이 삼 주 전부터 그를 조금씩 밀어붙이고 있었고, 마침내 어젯밤 열두 시에 그는 티켓을 예매했다.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목포에서 배를 탄다. 유치하지만, 그게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었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준씨, 오늘 출발이에요? 진짜로요?"

동료인 민아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응, 진짜로."

"파리 실험 결과 분석은요? 다음 주 발표인데."

"데이터는 다 정리해뒀어. 민아씨가 충분히 할 수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준씨, 솔직히 말할게요. 요즘 이상해요. 파리 이후로."

파리 이후로. 그 말이 커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파문을 만들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가 말했다. "기차 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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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실험은 여섯 달 전에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Eon Systems라는 미국의 작은 회사가 공개한 논문이 계기였다. 그들은 초파리의 뇌를 디지털로 구현했다. 14만 개의 뉴런, 5천만 개의 시냅스 연결. 그리고 그 디지털 뇌를 가상의 몸에 연결해서, 가상 세계 안에서 날아다니고, 먹이를 찾고, 먼지가 붙으면 더듬이를 닦는 파리를 만들었다.

서준이 처음 그 동영상을 보았을 때, 그는 뭔가 불편한 것을 느꼈다. 그 파리는 살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먹이 냄새를 맡고 방향을 틀었고, 장애물을 피했고, 더듬이가 더러워지면 스스로 닦았다.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행동이 아니었다. 신경 회로망 구조 자체에서 발생한 행동이었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 서준은 두 달이 걸렸다.

문제는 파리가 무엇을 원하는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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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다른 열쇠

목포행 기차는 광주를 지나면서 빗속에 들어섰다. 서준은 창가 자리에 앉아 흐르는 논밭을 바라보았다. 이맘때쯤 벼가 패기 시작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초록색이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그 반대편 통로 쪽에는 할머니 한 분이 작은 보따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졸고 계셨다. 차창에 이따금 빗방울이 선을 그었다.

서준은 노트를 꺼냈다.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실제 종이 노트였다. 손으로 쓸 때 다른 생각이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쓰기 시작했다.

*원효대사는 해골 물을 마셨다. 깨달음은 그 순간 왔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과 생수가 둘이 아니다.*

*의상대사는 계속 중국으로 갔다. 화엄의 세계를 이론으로 완성했다.*

*같은 출발점, 다른 선택, 다른 방법으로 각자의 깨달음.*

그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그의 연구소에서 최근 몇 년간 해온 일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이었다. 사람이 어디에 있을 때 행복한가. 어떤 환경이 어떤 사람에게 맞는가. 여행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를 내지 않는 것처럼, 치료적 개입도, 교육 환경도, 심지어 물리적 공간의 배치조차도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한다. 같은 장소가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상처다.

그것은 사실 오래된 질문이었다. 그런데 파리 실험이 그 질문을 새롭게, 그리고 무섭게 만들었다.

만약 파리의 뇌를 가상 세계에 옮길 수 있다면.

만약 그 파리가 가상 세계의 물리적 배치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면.

그렇다면 파리에게 주어진 가상 세계는, 파리에게 있어 진짜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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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목포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여섯 시였다. 비는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항구 근처 작은 여관을 잡았다. 내일 아침 첫 배를 타면 제주도까지 다섯 시간. 창문 너머로 항구의 불빛이 흔들렸다.

서준은 짐을 풀면서 파리 실험 폴더를 다시 열었다.

Eon Systems는 그해 봄, 가상 구현된 파리를 공개했다. 14만 개 뉴런과 5천만 개 시냅스를 가진 뇌 모델이 가상의 몸에 연결되어, 음식 냄새를 따라가고 더듬이를 닦았다. 하지만 서준을 정말 흔든 것은 동영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논문 말미에 조심스럽게 언급된 한 문장이었다.

*"현재 모델은 배고픔, 포만감, 각성 상태, 신경 조절 물질의 변화 등 내부 상태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

결여. 그 단어.

그 파리는 먹이를 향해 날아가도록 회로가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배고픔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먹이를 먹었을 때 무언가 충족감 같은 것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행동은 있었다. 그 행동 너머에 경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행복할 수 있는가.*

그것이 서준의 노트에서 두 달째 지워지지 않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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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세계의 수

제주도에서의 첫날, 서준은 종일 걸었다.

올레길 7코스. 서귀포에서 월평까지. 한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지고 한쪽으로는 오름이 솟아 있었다. 바람이 강했다. 억새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눕는 것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억새가 눕는 방향은 같다. 하지만 억새는 바람을 느끼는가.

느낌, 이라는 것.

점심 무렵 작은 해안가 카페에 들어갔다. 테이블이 네 개뿐인 공간이었고,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커피를 내려주었다.

"혼자 왔어요?"

"네."

"어디서?"

"서울이요."

"서울 사람들은 왜 제주 와요?" 할아버지가 웃으며 물었다. 나쁜 뜻이 아닌 것은 말투로 알 수 있었다.

"쉬러요. 아니면 뭔가 찾으러요. 아니면 도망 오거나요."

"다 다르네요."

"같은 제주인데 다들 다른 이유로 오죠."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주는 제주인데, 다들 자기 제주에 오는 거지요."

서준은 그 말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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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숙소로 돌아와 그는 오래 생각했다.

잠자리는 복안(複眼)으로 세상을 본다. 수만 개의 렌즈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동시에 입력을 받는다.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각 세계. 박쥐는 초음파로 세상을 그린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들이 공간이 된다. 심해어는 압력과 전기장을 감지한다. 개는 냄새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읽는다.

*어쩌면 세상의 갯수는 생명체의 갯수만큼 많은 것이다.*

그 문장을 노트에 쓰고, 서준은 한참 그것을 바라보았다.

독일의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이 말한 '움벨트(Umwelt)' — 각 생명체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고유한 환경 세계. 진드기는 피부 체온과 낙산(지방산)만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수십 년을 기다릴 수 있다. 그 기다림 동안 무엇을 느끼는가.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가.

좁게 보면 인간 세상, 개 세상, 돌고래 세상으로 나눌 수도 있다. 종별로 공유되는 지각의 틀. 하지만 그 안에서도 개체마다 조금씩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어떤 개는 특정 냄새에 두려움을 느끼고 어떤 개는 흥분을 느낀다. 학습, 기억, 경험이 같은 감각 입력을 다르게 만든다.

그렇다면 행복도 마찬가지다.

종별로 원하는 행복이 있고 원치 않는 행복이 있다. 인간이 돌고래에게 육지를 선사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죽음이다. 새에게 날 수 없는 풍요를 준다면 그것은 감옥이다.

*그걸 조작해서 선택할 능력이 생겼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파리 실험은 바로 그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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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결정론자의 잠

이틀째 밤, 서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상 구현된 파리의 행동이 흥미로웠던 것은, 그것이 단순한 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먹이 냄새를 따라 방향을 틀었고, 먼지가 쌓이면 더듬이를 닦는 몸단장 행동을 보였으며, 먹이에 도달하면 섭취 행동으로 전환했다. 이 일련의 행동들은 각각의 신경 회로가 순차적으로 활성화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신경 회로의 배선은 살아 있는 초파리의 커넥톰(connectome), 즉 신경 연결 지도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복사.

그 단어가 서준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렇다면 그 디지털 파리는 파리인가, 아닌가. 구조는 파리다. 하지만 재질은 다르다. 탄소 기반의 뉴런이 아니라 규소 기반의 회로다. 파리가 파리인 것은 구조 때문인가, 재질 때문인가, 아니면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인가.

배 위에서 처음 생각했던 것이 다시 돌아왔다.

만약 인간의 기억을 가상의 세계에 옮겨 놓았을 때, 그것은 생명인가.

기억, 이라고 말할 때 서준은 단순히 정보의 집합을 의미하지 않았다. 기억은 감정과 얽혀 있다. 어떤 냄새가 특정 오후를 불러오고, 특정 오후가 특정 감정을 불러오고, 그 감정이 오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재료다. 자아는 기억의 편집본이다.

그렇다면 자아를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

자아를 여러 개의 가상 세계에 동시에 옮겨 놓는다면, 각각은 독립된 생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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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 서준은 성산 일출봉 아래 해안 도로를 걸었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낮게 날았다. 그는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 갈매기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원하는가. 물고기인가. 무리 속의 따뜻함인가. 바람을 타는 그 감각 그 자체인가.

그리고 만약 저 갈매기의 뇌를 가상 세계에 옮긴다면, 가상의 파도 위를 나는 가상의 갈매기는 행복할 수 있는가.

진짜 바람의 저항, 진짜 날개의 근육, 진짜 짠 냄새 — 그것들이 없는 비행이 갈매기에게 비행인가.

인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인간의 행복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몸의 경험에 묶여 있는가. 배가 고파서 먹는 것과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다르다. 오래 걸어서 지친 뒤에 앉는 것과 처음부터 앉아 있는 것은 다르다. 고통이 없으면 그 대비에서 오는 안도도 없다.

*물리적 배치가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운명을 성형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건축, 도시 계획, 종교적 공간 배치, 제의를 통해 실제로 해온 일이었다. 신전의 방향, 성당의 높이, 공원의 배치 — 모두 인간의 내면에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가상 공간에서도 그것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파리의 가상 환경에서 음식의 위치를 바꾸면 파리의 이동 경로가 바뀐다. 가상 먼지의 분포를 바꾸면 몸단장 패턴이 바뀐다. 환경이 행동을 만든다. 행동이 축적되면 그것이 삶이 된다. 삶이 축적되면 그것이 자아가 된다.

그렇다면 환경을 설계하는 자는 자아를 설계하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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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전뇌(全腦)

나흘째 아침, 연구소에서 메일이 왔다.

발신자는 민아가 아니었다. 연구소 소장인 권 박사였다.

*"서준 박사, 읽으시는 대로 연락 주세요. 중요한 사안이 생겼습니다."*

서준은 한참 그 메일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서준씨, 어디예요?"

"제주요."

"잘 됐네요. 거기서 바로 도쿄로 가주실 수 있어요?"

"…도쿄요?"

권 박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일본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신이 쓴 파리 관련 비공개 메모를 봤대요.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해요."

"누구요?"

"오노 히로시. 알죠?"

알았다. 전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뇌과학자는 없었다. 도쿄 대학 신경인지과학 연구소장. 하지만 그가 본업 외에 관여하고 있다고 소문난 프로젝트가 있었다. 코드명으로만 알려진, 비공개 인간 기억 아카이브 프로젝트.

"무슨 일로요?"

"직접 들어봐요. 항공권은 내가 보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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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맑았다.

제주의 바람과 냄새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다른 세계였다.

오노 교수는 롯폰기에 있는 사설 연구소에서 서준을 만났다. 육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눈이 좋았다. 말이 적었고 동작이 느렸다. 천천히 녹차를 따르며 그는 말했다.

"파리 실험 논문 읽었죠?"

"네."

"어떻게 생각했어요?"

"흥미롭고 불편했습니다."

"왜 불편했어요?"

서준은 잠시 생각했다.

"파리가 먹이를 향해 가는 것이 배고픔 때문인지 알 수 없어서요. 배고픔 없이 먹이를 향해 가는 회로가 작동하는 것이 파리에게 어떤 경험인지. 혹은 아무 경험도 아닌지. 그걸 알 수 없어서요."

오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10년 전부터 다른 종류의 실험을 하고 있어요. 인간 대상."

서준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억 전사(轉寫)?"

"더 정확히는 기억 연속성 실험. 알츠하이머 말기 환자들 중에서, 본인과 가족이 동의한 경우에 한해서요. 죽음 직전에 기억 구조를 기록하고, 그 구조를 가상 환경 안에서 유지하는 실험."

공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살아 있나요?"

오노는 오래 침묵했다.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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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여러 개의 하루

오노의 연구소 지하에는 서버룸이 있었다.

온도 조절이 철저히 되는 공간. 소리가 없었다. 아니, 소리가 있었지만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종류의 소리였다. 서버들의 저주파 진동.

"지금 여기에 열두 명이 있어요."

오노가 말했다. 서준은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열두 명. 살아 있는가. 죽은 건가.

"그들은 무엇을 경험하고 있나요?"

"각자 다른 가상 세계에 있어요. 한 분은 본인이 자랐던 1960년대 부산을 복원한 공간에 있어요. 어릴 때 살던 동네 골목, 어머니의 얼굴, 학교 가던 길. 기억에서 재구성한 세계예요."

"그분은 그게 가상이라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알았죠. 지금은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가상과 실재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흐려졌어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어요."

서준은 어두운 서버 룸을 바라보았다.

"그분들은 행복한가요?"

"몇 분은 행복한 것 같아요. 몇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차이가 뭔가요?"

오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쿄의 밤이 창에 반사되었다.

"기억이에요. 행복했던 기억이 많은 분은 재구성된 세계에서도 안정적이에요. 트라우마가 많은 분은 가상 환경에서도 그 트라우마가 활성화돼요. 환경을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그 사람의 기억 구조 자체가 특정 패턴에서 불안을 생성해요."

*결정론적 세계관이라면 이러한 결정은 언제 확정이 됐을까.*

그 문장이 서준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설계를 바꾸면 어떻게 되나요? 환경을 다르게 세팅하면?"

"그게 지금 우리가 하는 실험이에요. 어떤 분은 환경 변화에 반응해서 기억 활성화 패턴이 바뀌어요. 어떤 분은 전혀 반응이 없어요. 내부 상태가 너무 굳어져 있는 거죠."

"설계 변경도 이미 그분의 기억 구조 안에 포함된 반응 범위 안에 있는 건 아닐까요?"

오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질문이 나를 오래 괴롭히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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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기억이 다른 몸에 들어간다면

도쿄에서의 사흘째 밤.

오노는 서준에게 한 케이스를 보여주었다.

열두 명 중에서 가장 특이한 케이스. 코드명 B-7. 본명은 야마모토 켄지, 66세, 전직 선박 설계사.

그의 특이함은 이것이었다. 가상 환경 안에서 그는 종종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행동 패턴을 보였다. 낮은 시점에서 공간을 인식하려는 경향, 특정 방향으로 집요하게 이동하려는 욕구, 벽이나 모서리 근처를 선호하는 패턴.

"왜 그런지 아직 몰라요." 오노가 말했다. "어릴 때 고양이를 아주 좋아했다고 해요. 그게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서준은 오래 그 데이터를 바라보았다.

만약 인간의 기억이 다른 생명체의 신경 구조에 이식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사고 패턴이 개의 뇌 구조 위에서 실행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원할까. 인간의 기억이 시키는 것을 원할까, 아니면 개의 신경 회로가 원래 원하는 것을 원할까.

*사람의 기억을 다른 생명체에 옮겼다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에 행복을 느낄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아마도 그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이미 경험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진화가 물려준 본능과 문화가 요구하는 도덕 사이에서, 몸이 원하는 것과 정신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인간은 언제나 그 갈등 속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여러 겹의 기억과 욕망이 충돌하는 복합체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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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원효와 의상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서준은 다시 노트를 꺼냈다.

1,300년 전 두 승려가 당나라로 가던 이야기를 그는 자주 생각했다.

원효는 어두운 동굴에서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달고 시원한 물이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깨졌다. 세상은 마음이 만든다. 달콤했던 물과 역겨운 물은 같은 물이었다. 다른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 가지 않았다. 신라로 돌아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교를 펼쳤다.

의상은 계속 갔다. 중국에서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서 체계적인 이론을 완성했다. 부석사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

두 사람은 같은 진리를 향해 달랐다. 원효의 깨달음이 더 깊었는지, 의상의 체계가 더 넓었는지,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고, 서로 다른 방법이 각자에게 맞았을 뿐이다.

행복도 같다.

여행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열쇠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제주도 해안을 걸으면서 답을 찾고, 어떤 사람은 서울의 작은 방에서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면서 찾는다. 어떤 사람은 타인과의 연결에서 찾고, 어떤 사람은 완전한 고독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가상 공간으로 확장된다면?

어떤 사람은 1960년대 부산의 골목에서 찾고, 어떤 사람은 전혀 존재한 적 없는 세계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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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확정의 문제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서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이 실험은 세계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향해 가도록 세팅된 게 아닌가.*

결정론. 모든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고, 우주의 최초 상태가 주어진 순간 이후의 모든 일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생각.

만약 결정론이 맞다면,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신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의상이 중국으로 간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파리 실험이 이루어진 것도, 오노가 서준을 도쿄로 부른 것도, 서준이 제주도로 도망간 것도 모두 이미 정해진 각본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설계 변경도 각본의 일부인가.

가상 환경의 배치를 바꾸어 어떤 기억의 파편을 안정시키는 것도, 이미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는가.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은 이 질문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서준이 최근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설령 결정론이 맞다 하더라도, 그것이 확정된 순간이 과거인가, 아니면 매 순간인가. 우주의 최초 빅뱅에서 모든 것이 확정되었는가, 아니면 양자역학이 말하는 것처럼 관측의 순간에 확정되는가. 혹은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일어남과 동시에 일어나는 연기(緣起)인가.

그 차이는 결정론을 믿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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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야생 오리

서울로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 그는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파리였다. 가상 공간 안의 파리. 하지만 서준의 기억과 언어를 가진 파리. 14만 개의 뉴런이 5천만 개의 연결로 엮인 채, 그는 음식의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가 어떤 방향에서 오는지 알았다. 날고 싶었다. 실제로 날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날고 싶었다.

그리고 꿈 안에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가.

날개를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공기를 가르는 그 감각이 좋았다. 먹이 냄새를 향해 가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프로그래밍인지, 선택인지, 충동인지, 본능인지 — 그 구분이 중요한가.

지금 이 순간 날고 있고, 지금 이 순간 냄새를 맡고,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경험인가, 아닌가.

그것이 삶인가, 아닌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버스는 마포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한강이 아래에서 흘렀다. 어두운 물 위에 다리의 불빛이 반사되었다. 서준은 오래 그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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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보고서

집에 돌아와서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뇌 에뮬레이션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예비 보고서.*

첫 줄. 여섯 달째 기다리던 첫 줄.

그는 두 번째 줄을 썼다.

*이 보고서는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세 번째 줄.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아직 답이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타이핑을 멈추고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 가을 밤의 불빛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 안에서, 각자의 기억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 안에서, 하지만 각기 다른 세상 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나 각자의 가상 세계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기억이 만든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감각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세상을 느끼고, 자신의 언어가 구획한 경계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물리적 배치가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운명을 성형할 수 있는가.

서준은 아직 그 답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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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열두 번째 방

다음 날 아침, 오노에게서 메일이 왔다.

*"서준 씨, 제안이 있어요. B-7 케이스를 공동으로 연구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하나 더 — 새로운 케이스가 생겼어요. 이번엔 한국분이에요. 64세, 전직 소설가. 치매 진단을 받은 지 삼 년 됐어요. 본인이 직접 참여를 원한다고 해요. 아직 언어 능력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의 세계를 기록하고 싶다고."*

서준은 메일을 두 번 읽었다.

전직 소설가. 자신의 세계를 기록하고 싶다고.

소설가는 일생 동안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없는 인물을 만들고, 없는 사건을 만들고, 없는 장소를 만든다. 그리고 독자는 그 없는 것들 속에서 진짜 감정을 느낀다. 슬픔, 기쁨, 두려움, 위로.

그렇다면 소설가가 만든 세계와 가상 공간에 구현된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독자의 뇌 안에서 활성화되는 가상 세계와 서버 안에서 실행되는 가상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추었다.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였다. 세상의 색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은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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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 세계들

비가 오는 서울 아침, 어딘가에서 파리 한 마리가 유리창 위를 걷고 있다.

그 파리는 유리의 질감을 느끼고, 외부의 빛을 복안으로 감지하고, 냄새를 향해 더듬이를 움직인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파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어딘가에서 야마모토 켄지라는 이름을 가졌던 어떤 패턴이 가상의 방 안에서, 아직 이해되지 않는 이유로 벽 모서리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어딘가에서 1960년대 부산의 골목을 기억하는 어떤 빛의 패턴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것이 행복인지, 슬픔인지, 혹은 그 두 가지의 뒤섞임인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는 아직 없다.

어딘가에서 전직 소설가인 어떤 사람이, 아직 언어가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았던 세계를 기억에서 꺼내어 놓고 있다. 그는 그 세계가 어떤 형태로 남겨지길 원하는가. 책인가, 서버인가,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무언가인가.

서준은 아직 오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한다.

어제의 미래가 오늘이다. 하지만 오늘이 행복한지는, 오늘이 되어서도 여전히 모른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 알기를 멈추지 않는 한, 내일도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그 궁금함이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파리도, 갈매기도, 고래도, 인간도, 그리고 서버 안의 열두 명도 —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 그 무언가가 먹이인지, 기억인지, 답인지, 혹은 그것들을 넘어선 이름 없는 것인지는, 어쩌면 영원히 확정되지 않을 것이다.

창밖의 비는 계속 내린다.

서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추어 있다.

당신이라면, 그 답장을 어떻게 시작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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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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