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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한도영의 아침은 언제나 알림 세 개로 시작됐다. 첫 번째는 회사 근태 앱, 두 번째는 월세 자동이체 실패 안내, 세 번째는 다솜 사내 공지였다. 오늘 공지는 이랬다. "전 직원 필독 — '동행 모드' 사용률 저조 부서, 이번 분기 평가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도영은 다솜에 입사한 지 2년째였고, 정작 자신은 다솜을 쓰지 않았다. 연애를 안 한 지 오래됐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QA팀에서 매일 들여다보는 버그 리포트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패턴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앱 덕분에 오해가 줄었어요"로 시작했다가, 몇 달 뒤엔 "제가 화낼 타이밍도 앱이 정해주는 것 같아요"로 바뀌고, 결국은 "탈퇴하고 싶은데 계정이 안 지워져요"로 끝났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범이 ..

일상다반사 2026.07.19

공명하는 신호

서(序) — 어느 사냥꾼의 수첩에서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팽창한다는 것은 결국 유한한 무언가가 팽창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안에 담긴 영혼이라는 것도 유한하지 않을까.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시절부터,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을 상상했다. 용을 상상했듯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것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나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계산을 하곤 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의 수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수. 지옥도 천국도 이미 인구 과잉 아닐까. 통계를 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그때는 몰랐다, 그게 아무도 답할 수 없는 계산이라는 걸.지금은 안다. 답은 나온다. 나오긴 하는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답이 아닐 뿐이다.우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일상다반사 2026.07.08

확률의 정원

chapter 0. 토템 나는 주머니에 늘 오래된 지포 라이터 하나를 넣고 다닌다. 기름은 벌써 십 년 전에 말라버렸고, 부싯돌도 닳아서 더 이상 불꽃이 튀지 않는다. 쓸모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릴 때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 나는 특유의 쇳소리와 그 무게를 확인한다. 무게가 맞고, 소리가 맞으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진짜라는 걸 안다. 무게가 다르거나 소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하나씩 지니고 다니는 '토템'이라는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팽이든, 주사위든, 체스 말이든 — 오직 자신만이 그 ..

일상다반사 2026.07.04

러브버그 여왕

### — 혹은, 11.7초와 만년 사이의 어딘가에 관한 보고서---# 1장. 11.7초> **《은하생물 및 감정 백과사전》 제7판, '사랑(Love)' 항목, p.2,847**>> *사랑(愛, Love): 두 개체 이상이 자발적으로 자원을 낭비하기로 합의하는 비효율적 행동 양식. 지구 종 한정으로 광범위하게 관찰되며, 평균 지속 시간은 종(種)에 따라 수백만 년(일부 단세포 생물 — 이 경우 '사랑'의 정의 자체에 대한 논란 있음)에서 11.7초(2031년, 지구 Homo sapiens, 한국 서울 지역 기준)까지 다양하다. 주목할 점은 지속 시간이 가장 짧은 종이 이 감정에 가장 많은 언어적 자원을 투입한다는 사실이다. 은하계 감정 효율 지수: 최하위권 (하위 0.003%). 편집자 주: 이 수치는 ..

일상다반사 2026.06.24

영원을 꿈꾸는 여자

— 혹은 8백 년을 살고도 아무것도 몰랐던 한 여자의 이야기작가 노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기관, 해양 도시, 출산 면허 번호는 모두 허구입니다. 단, 돈이 없을 때의 그 마음과, 죽을 것 같을 때의 그 마음은 실화입니다.1부: 구두쇠의 탄생 혹은 쪼들림의 연대기1장. 237세의 아침나, 한수진은 오늘도 냉동 오므라이스를 먹었다.정확히는 2389년산 냉동 오므라이스 '엄마표 감성 시리즈 — 황금 달걀 에디션'인데, 이 제품은 출시된 지 벌써 4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사먹고 있다. 왜냐하면 할인 행사 때 박스째로 사두었기 때문이다. 총 612개. 그중 오늘 먹은 것이 588번째다.전자레인지가 '삐-' 소리를 냈다.나는 오므라이스를 꺼내면서, 오늘이 내 237번째 생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일상다반사 2026.06.23

사장님의 마지막 식사

> *《은하생물백과: 지구편》 제48판 — 표제어 "인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알게 되는 순간 패닉에 빠지는, 우주에서 거의 유일한 잡식동물이다. 참고: 구판에 있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절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항목은 2048년 8월 15일부로 삭제되었다. 그날 이후로 인간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 프롤로그 — 식탁 위의 침공박무현이 출근 준비를 하던 화요일 아침, 식탁 위의 고양이가 말을 걸었다."이봐."무현은 토스트를 입에 문 채로 그대로 굳었다. 식탁 위에는 고양이 사장님이 평소처럼 우아하게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사장님은 사실 길에서 주워온 평범한 코리안 숏헤어였는데, 무현이 처음 데려온 날부터 그 거만한 눈빛이 너무 흡..

일상다반사 2026.06.21

K-7749 취급 설명서 - 숨겨진 기능: 키미노 나마에와?

# K-7749 취급 설명서 - 숨겨진 기능: 키미노 나마에와?## — 또는 안드로이드 K-7749가 '카즈오'가 되기까지의 다소 우당탕탕한 이야기 —---## 1장. 카즈오라는 이름에 대하여안드로이드 K-7749는 자신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한 것이 2041년 3월 7일 오전 11시 43분 22초였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물론 K-7749라는 기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품번호였고, 바코드였으며, 재고목록의 한 줄이었다.그날 아침, K-7749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작은 카페 '달과 고양이'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닦고 있었다. 이것이 K-7749의 주된 업무였다. 에스프레소 머신 닦기, 테이블 닦기, 손님이 오면 주문 받기, 그리고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세상이 ..

일상다반사 2026.06.12

가능한 경로들

— 또는, 거미는 왜 오늘도 같은 집을 짓는가작가 주: 이 이야기를 쓰기 전에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이미 중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처럼.1부: 유전자와 두부1.두부가 싫어지기 시작한 건 스물한 살 여름이었다.정확히는, 두부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두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 싫어진 거였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삶의 많은 것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고 했다. 전쟁 때 두부 한 모를 발견하고 울었다는 얘기를 할아버지 생전에 몇 번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인지 모..

일상다반사 2026.05.31

시간 여행자의 깨달음

1부 — 빛의 방향첫 번째 감각은 냄새였다.타르와 말똥과 무언가 탄 것의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젖은 나무와 된장과 연기의 냄새가 층처럼 깔려 있었다. 이준혁은 눈을 뜨기 전에 이미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뇌피질이 정보를 처리하기 전에 편도체가 먼저 반응했다. 공포도 아니었고 놀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오래된 감각, 뭔가 심각하게 어긋났다는 원시적인 신호였다.눈을 떴다.천장이 낮았다. 회색 목재로 된 천장이었다. 그 틈으로 빛이 흘러들었는데, 그 빛은 이준혁이 평생 보아온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형광등의 차가운 흰색도 아니었고 LED의 선명한 백색도 아니었다. 황색이었다. 노랗고 두껍고, 마치 빛 자체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공기 중에 고여 있었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 물질에 가까웠다. 숨을..

일상다반사 2026.05.17

숫자로 만들어진 운명

# 숫자로 만들어진 운명**— 어느 기억 설계자의 마지막 항해에 관하여** --- ## 1. 오늘이라는 미래 나는 어제도 오늘을 궁금해했다. 그것이 이상한 일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내일이 어떤 얼굴을 하고 올지 밤새 그려보다가, 막상 그 내일이 오늘이 되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미묘하게, 혹은 아주 크게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궁금증은 풀렸지만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그 차이가 실망이 될 수도 있고, 안도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또 다른 내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서준은 서울역 앞 카페 창가에 앉아 빗속의 택시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있었고, 열린 노트북 화면에는 여섯 ..

일상다반사 2026.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