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나가메야에서 온 소리

요긴소프트 2026. 1. 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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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 버스를 놓친 날

또 버스를 놓쳤다.

오늘은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눈앞에서 출발해 버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정류장에 서서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봤다. 레쉬트 언어임상센터 선배한테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나, 김현우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다. 어중간한 성적으로 어중간한 대학을 졸업하고,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었다. 대학 동기들은 하나둘씩 합격 소식을 전해왔지만,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모임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날은 배달대행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돌아보니, 출입문 옆에 임상시험 지원자를 모집하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만 19세 이상 30세 미만, 외국어 듣기와 말하기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5일간 참여하면 2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네팔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예전에 가구 공장에서 알바할 때 만난 에티샤라는 친구 덕분이었다. 에티샤와는 거의 1년간 함께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네팔어를 익혔다. 에티샤는 내가 네팔어에 소질이 있다며, 특히 발음이 좋다고 칭찬해 주곤 했다.

'네팔어도 외국어로 인정해 줄까?'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보상금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 2장 - 실험쥐가 되다

레쉬트 임상언어센터는 청량리역 근처 언덕 위에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나는 200만 원만 생각했다. 면접은 간단했다. 전날 밤 열심히 외운 네팔어 문법은 필요 없었다. 간단한 일상 회화 위주로 말하기와 듣기만 테스트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면접관의 네팔어 발음이 에티샤와 거의 똑같이 들렸다. 마치 원어민처럼 자연스러웠다. 옆 사람과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것도 능숙해 보였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여러 나라 말을 잘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면접관은 내가 네팔어로 지원했다고 하자 눈에 띄게 반가워했다. 나는 무사히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기쁜 마음에 에티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머스떼, 에티샤."

에티샤도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알바비를 받으면 동대문 에베레스트 식당에서 네팔 음식을 사겠다고 약속했다. 에티샤는 좋아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부터 임상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일곱 명의 참가자가 있었다. 우리는 각자 방음이 잘 된 칸막이 방으로 안내받았다. 첫날은 하루 종일 헤드셋을 통해 네팔어를 들었다. 드문드문 아는 단어가 들렸지만, 대부분 내용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점심시간에 다른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김요한이라는 친구와 친해졌다. 요한이는 어릴 때 스페인에서 살다 왔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들려준 스페인어는 제주 방언처럼 알아듣기 힘들다고 했다.

첫날 시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잠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히말라야 어딘가에 있는 사원에서 네팔어로 어떤 아저씨와 토론하고 있었다. 깨고 나니 조금 찜찜했다. '이게 혹시 부작용인가?'

## 3장 -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다

둘째 날에는 핸드폰 사용이 허락되었다. 소리는 들을 수 없고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은 안 되는 조건이었다. 계속 듣다 보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뉘앙스가 느껴졌다.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불안해하는 느낌들이었다. 가끔 분노를 넘어 저주처럼 들리는 대화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침했다.

오후에는 태블릿으로 100개의 짧은 대화를 듣고 느낌을 체크하는 시험이었다. 모든 보기에 0부터 10까지 강도를 입력해야 했고, 합이 10이 되어야 했다. 나는 빨리 끝내려고 집중했고, 30분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뉴스를 봤다. 경기도 광주 가구공장에서 불이 나 네팔 근로자 포함 2명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에티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다른 공장이겠지. 일찍 잠들었겠지.'

애써 외면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또 네팔어 꿈을 꿨다. 어제 꿈속의 사원에서 같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에티샤가 걸어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에티샤는 조용히 나를 보며 물었다.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기억해?"

잠에서 깨어났지만 꿈속 장면이 너무 생생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에티샤가 말했던 이름의 뜻이 떠올랐다.

에티샤(Etisha)는 "beginning after the end", 끝 이후의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불길한 느낌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었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 4장 - 작별

셋째 날 시험은 처음 들어보는 스페인어를 듣는 것이었다. 거의 외계어 같았다. 힘든 오전을 마치고 점심시간에 다시 에티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티샤의 부고였다.

가구공장 합선으로 불이 났고, 옆 숙소까지 불이 옮겨붙었다. 불은 빨리 껐지만, 유독가스에 질식해 숨을 거뒀다고 했다. 내일이 발인이라고 했다.

나는 연구원을 찾아가 친구가 죽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건조하게 임상시험 중단에 따른 안내를 해줬다. 보상금은 취소되고 교통비만 지급된다고 했다. 요한이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었다. 에티샤가 말했던 이모님도 함께 돌아가셨다. 네팔 이주 노조위원장이라는 분이 몇 안 되는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후 5시쯤,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사람은 안치실로 모이라는 안내가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 내가 먼저 들어갔다. 장의사가 관계를 물어 조카라고 대답했다. 에티샤에게 이모 같은 분이셨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티샤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만지니 그제야 죽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잘 가라고, 거기서는 다시 행복한 시작을 하라고 기도했다.

저녁이 되자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8시쯤 되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듯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네팔어였다. 그것도 꿈속에서 들었던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김현우 씨." 노조위원장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발인에 참여했다. 화장 절차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에티샤의 유골은 노조에서 보관하다가 네팔로 가는 자원봉사자가 있으면 그때 유가족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죽어서도 집으로 바로 갈 수 없는 에티샤가 더 측은했다.

## 5장 - 레쉬트의 비밀

주말을 멍하니 보내고 월요일 아침, 레쉬트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교통비를 지급하겠다며 계좌번호를 물었다. 입금 문자를 확인하고 나니 '이러다 굶어 죽기 딱 좋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인 사이트를 뒤지다가 레쉬트 센터에서 연구 보조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자격 요건이 임상시험 요건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지체 없이 이력서를 보냈다.

일주일 후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관들은 심리 테스트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네팔어 단어와 가장 심한 욕을 물었다. 나는 에티샤라고 대답했고, 욕은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말 욕 중 가장 심한 욕을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군대에서 들었던 '야이 기시키야'를 그때의 감정을 담아 말했다. 순간 면접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망했다' 싶었지만, 다음 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출근 첫날, 요한이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우리는 연구소장실로 안내되었다. 연구소장은 나에게는 네팔어로, 요한이에게는 스페인어로 반갑다고 인사했다. 발음이 완벽했다. 우리말 인사까지도 잘 훈련된 아나운서처럼 정확하고 편안했다.

그리고 배정된 부서에는 면접 때 나에게 욕을 시켰던 그 연구원이 있었다.

## 6장 - 말씀의 의미

레쉬트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이 연구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선배는 술을 마시며 연구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레쉬트는 히브리어로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창세기 첫 구절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쓰인 단어였다. 연구소 원장은 기독교에 관심이 많아 히브리어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던 분이라고 했다. 부원장은 불교의 관세음보살을 연구하고 있었다.

원장이 요즘 심취해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원장의 생각은 이랬다. 빅뱅으로 우주의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면, 빅뱅 이전에 있었던 것, 빅뱅을 야기시킨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선배는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줬다. 부원장이 연구하는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고 했다. 왜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일까?

"소리에는 문자로 전달할 수 없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야."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 불교, 유교의 경전들은 모두 창시자가 직접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 공자, 석가모니, 예수 모두 말로만 가르침을 전했고, 제자들이 나중에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문자로는 '소리'의 정보가 유실되기 때문이야. 돼지 소리를 '꿀꿀'이라고 적어놓고 한글만 배운 외국인에게 뜻을 맞춰보라고 하면 대부분 틀려. 하지만 소리를 들려주면 바로 알아차려."

주문도 마찬가지였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아브라카다브라' 같은 주문은 소리를 내서 발음해야 효력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인 'YHWH'도 정확한 발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 때문이었다.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어. 같은 진동수를 주면 공명이 일어나지. 오페라 가수가 소리만으로 와인잔을 깰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야."

선배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원장님을 비롯한 창립 멤버들은 생각했어. 옛날 성인들이 전한 말씀에는 특별한 '소리', 특별한 '파장'이 있었을 거라고. 그 소리가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켜 폭발적인 움직임이 생긴 거지."

## 7장 - 나가메야에서 온 소리

그날 밤, 나는 다시 꿈을 꿨다.

히말라야 어딘가에 있는 사원이었다. 처음 꿈에서 만났던 그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넌 듣는 법을 배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보는 법을 말이야."

그때 에티샤가 나타났다.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현우야, 내가 왜 네팔어를 가르쳐줬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듣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야. 네가 내 발음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소질이 아니야. 넌 소리 속에 담긴 마음을 들을 줄 알았어."

에티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이제 나가메야로 가. 죽음 이후의 땅. 하지만 거긴 끝이 아니야. 새로운 시작이지. 내 이름처럼 말이야."

"나가메야?"

"티베트 전설에 나오는 곳이야. 사자의 형제들이 죽음을 넘어 함께 가는 땅. 거기서는 진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어.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에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언젠가는 오게 될 거야. 모두가 가는 곳이니까. 하지만 서두르지 마. 네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

"무슨 일?"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주는 일. 네가 날 들어줬던 것처럼."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 8장 - 듣는 자

그 후로 나는 레쉬트에서 열심히 일했다.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대상자들을 안내하고, 결과를 정리했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 치료법의 베타 테스터가 되었다.

어느 날 선배가 물었다. "너, 둘째 날 시험에서 왜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알아?"

"몰라요. 그냥 느낌대로 답했을 뿐인데."

"넌 공감 능력이 뛰어나. 소리 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남다르다고."

선배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연구소에서 찾는 건 바로 그런 사람이야. 소리를 진짜로 들을 줄 아는 사람.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사람."

나는 에티샤를 떠올렸다. 에티샤는 항상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하지 않고, 그저 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에티샤와 이야기할 때 편안했다.

"선배, 제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왜 옛날 성인들은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소리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선배는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현우야, 네가 에티샤 생각할 때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

나는 잠시 생각했다. "목소리요. 웃을 때 목소리가 제일 먼저 생각나요."

"그거야.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보다 목소리를 먼저 떠올려.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겨 있거든. 성경에서 '말씀'이라고 한 건 단순히 단어가 아니야.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거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9장 - 새로운 시작

레쉬트에서 일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요한이는 승진해서 연구원이 되었고, 나도 정식 연구 보조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센터에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심한 말더듬 증상 때문에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상담실로 안내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말이 막힐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고였다. 나는 서두르지 말라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 순간 나는 에티샤를 떠올렸다. 에티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방식을. 판단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주던 그 방식을.

퇴근 후 동대문 에베레스트 식당을 찾았다. 혼자였지만 두 사람 분량을 주문했다. 에티샤가 좋아하던 모모와 탕투크를 먹으며 조용히 말했다.

"에티샤, 나 이제 알 것 같아. 네가 왜 내게 네팔어를 가르쳐줬는지. 그건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었어. 듣는 법을 배우는 거였지."

그날 밤, 오랜만에 꿈을 꿨다. 히말라야 사원에서 에티샤와 그 아저씨가 함께 있었다. 에티샤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현우야."

"고마워, 에티샤. 네가 가르쳐준 것들, 잊지 않을게."

"알아. 그리고 있잖아, 현우야."

"응?"

"나는 죽은 게 아니야. 너의 기억 속에서, 네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나는 살아있어. 우리의 우정은 죽음보다 강하니까."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가가 젖어 있었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났다.

## 에필로그 - 나가메야로 가는 길

몇 년이 흘렀다. 나는 레쉬트의 연구원이 되었고, 언어 치료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로 말을 잃은 사람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어느 봄날, 네팔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에티샤의 유골을 고향에 전달했다는 노조위원장님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사진 한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히말라야가 보이는 작은 마을, 그곳 사원에 에티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었다.

"Etisha - Beginning after the end"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섞여 에티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나도 나가메야로 갈 것이다. 모두가 결국 가는 그곳으로. 하지만 그곳은 끝이 아니다. 에티샤의 이름처럼, 끝 이후의 시작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일.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듣는 일.

에티샤가 내게 가르쳐준 것처럼.

사무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내담자가 들어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리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다. 소리 속에 담긴 존재를,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를.

바람이 불어온다. 히말라야 너머, 나가메야에서 온 바람. 에티샨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바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랑과 우정은 죽음마저 넘어선다.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 속에서 영원히 살아간다.

그것이 진짜 '말씀'의 의미이고, 진짜 '시작'의 의미이다.

레쉬트, 태초. 모든 것이 말씀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의 우정도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나가메야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는 곳.

에티샤, 거기서 기다려줘. 언젠가 나도 갈게.

그때까지, 나는 여기서 네가 가르쳐준 것을 실천할게.

듣는 것을. 진짜로 듣는 것을.

그것이 내가 너를 기억하는 방법이고, 우리의 우정을 영원히 살려두는 방법이니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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