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선주와 여섯 번째 원

요긴소프트 2026. 1. 1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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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는 컴퍼스로 원을 그렸다. 다섯 번째 원이었다. 첫 번째 원은 컴퍼스 침이 미끄러져서 망쳤고, 두 번째는 선이 너무 굵었고, 세 번째는 시작점과 끝점이 맞지 않았다. 네 번째 원은 거의 완벽했지만 종이가 조금 찢어졌다.

"완벽한 원은 존재하지 않아." 아버지가 말했다.

선주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설계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매일 원을 그리잖아요."

"그건 원처럼 보이는 것들이지. 진짜 원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수학 시간에 배웠지? 점은 크기가 없고, 선은 폭이 없고, 원은 중심에서 모든 점까지의 거리가 정확히 같은 거라고."

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가 그린 이 점을 봐." 아버지가 선주의 공책을 가리켰다. "아무리 작아도 크기가 있어. 확대경으로 보면 작은 잉크 덩어리지. 진짜 점이 아니야."

"그럼 완벽한 원은 어디 있어요?"

"머릿속에만 있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지."

선주는 컴퍼스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5월의 오후였다. 자작나무 잎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럼 우리가 그리는 건 다 가짜예요?"

"가짜라기보다는... 충분히 가깝다고 할 수 있지. 95퍼센트의 원, 98퍼센트의 원. 그 정도면 원이라고 부를 수 있어."

선주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람도 그래요?"

"응?"

"승희는 제 90퍼센트 친구예요. 어제 싸웠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또 95퍼센트가 됐어요. 승희가 초콜릿을 나눠줬거든요."

아버지가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100퍼센트 친구는 없는 거예요?"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 찾으려고 평생을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어."

"왜요?"

"선주야, 네가 가장 싼 사탕 가게를 찾아서 온 동네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한 가게는 알사탕 한 개에 50원이고, 다른 가게는 48원이고, 또 다른 가게는 47원일 거야. 그렇게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 될까?"

"사탕을 살 시간이 없어져요."

"그렇지. 그리고 사탕을 먹을 시간도 없어지지."

선주는 다시 자기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다섯 개의 원이 거기 있었다.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모두 원처럼 보였다.

"아빠, 그럼 80퍼센트 원으로도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지. 때로는 그걸로 충분해."

며칠 후, 선주는 학교에서 새로운 남자아이를 만났다. 이름은 진수였다. 진수는 다른 반이었고, 쉬는 시간에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 읽어?" 선주가 물었다.

"곤충 도감이야."

"재미있어?"

"응. 딱정벌레는 전 세계에 35만 종이 넘는대."

"와."

그날부터 선주와 진수는 점심시간마다 함께 있었다. 진수는 곤충 이야기를 했고, 선주는 별자리 이야기를 했다. 둘 다 조용한 아이들이었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게 편했다.

어느 날 선주는 공책에 적었다. "진수 = 85%"

그다음 날은 "진수 = 90%" 였다. 진수가 자기가 좋아하는 조약돌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요일에는 "진수 = 60%"로 떨어졌다. 진수가 체육 시간에 선주 편이 아니라 반대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월요일, 선주는 진수를 찾을 수 없었다. 진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진수는 전학 갔어."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아버지 일 때문에 다른 도시로 이사했단다."

선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진수가 100퍼센트 친구였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제 그걸 확인할 수 없었다. 진수는 떠났고, 선주는 그저 공책에 적힌 숫자들만 가지고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선주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는 완벽한 사람을 만난 적 있어요?"

아버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둘 다 웃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는 양말을 항상 여기저기 두고, 커피를 너무 진하게 타."

"아빠는 코를 골고, 신문을 읽다가 잠들어." 엄마가 덧붙였다.

"그럼 80퍼센트예요?"

"글쎄." 아버지가 엄마 손을 잡았다. "어떤 날은 70퍼센트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95퍼센트 같기도 해.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야, 그 숫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왜요?"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선주는 이해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했다.

그날 밤, 선주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야광 별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붙인 것들이었다. 별자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북두칠성은 별이 여덟 개였고, 오리온자리는 조금 비뚤어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 별들은 빛났다.

선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완벽함이란 건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만들어간다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냥 함께 있는 것.

내일 승희와 놀이터에 가기로 했다. 승희는 완벽한 친구가 아니었다. 가끔 욕심이 많았고, 가끔 고집이 셌다. 하지만 승희는 선주의 비밀을 지켜주었고, 슬플 때 옆에 있어주었다.

진수는 어디선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진수에게 85퍼센트일지, 90퍼센트일지 선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수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선주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천장의 별들이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완벽한 별자리는 아니었지만, 선주의 별자리였다.

다음 날 아침, 선주는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완벽한 원은 없다. 완벽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그리고 컴퍼스를 들었다. 여섯 번째 원을 그렸다. 이번에도 완벽하지 않았다. 선이 조금 떨렸고, 시작점과 끝점이 정확히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원이었다.

선주는 그 원 안에 작은 집을 그렸다. 집에는 창문이 있었고, 창문 밖으로 나무가 보였다. 나무 아래에는 두 아이가 서 있었다. 한 아이는 곤충 도감을 들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별 지도를 들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원 안의 완벽하지 않은 그림. 하지만 선주는 그게 좋았다.

교실 창밖으로 5월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승희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주야! 오늘 놀이터 갈 거지?"

"응!"

선주는 공책을 덮었다. 오늘은 몇 퍼센트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75퍼센트일 수도 있고, 95퍼센트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오늘이 있다는 것, 승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놀이터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컴퍼스는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 내일 또 다른 원을 그릴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또 하나의 원.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선주는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가 사는 건 머릿속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이 세계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95퍼센트의 원도 원이고, 80퍼센트의 친구도 친구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선주는 승희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완벽하지 않은,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오월의 아침이었다.

---

스물여덟 살의 선주는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 번째 수정본이었다. 글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백도 어색했다. 12페이지의 그래프는 다시 그려야 했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켰다.

"내일 회의인데." 선주는 혼잣말을 했다. "거의 다 됐어."

하지만 거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선주는 완벽을 원했다. 상사도 완벽을 원했다. 고객도 완벽을 원했다. 모두가 완벽을 원하는 세상이었다.

선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도시의 불빛들만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선주를 불렀다. 오래된 공책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것. 표지는 바랬고 모서리는 해졌다.

선주는 공책을 펼쳤다. 어린 시절의 글씨체가 거기 있었다. "진수 = 85%", "승희 = 90%",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

"완벽한 원은 없다. 완벽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선주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언제 이런 걸 썼었나. 기억이 희미했다. 컴퍼스로 원을 그리던 오후, 아버지와 나눈 대화, 진수와 승희. 모든 게 아득히 멀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선주, 아직도 안 자니?"

"일하고 있어요."

"또? 어제도 밤샜잖니."

"이번 프로젝트가 중요해요."

전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선주야, 네가 찾는 게 뭐니?"

"완벽한 결과요."

"그걸 찾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선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승진? 인정? 만족감? 그것들이 선주가 원하는 것이긴 했지만,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엄마,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바빠서."

전화를 끊고 나서 선주는 다시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그 페이지에는 원 안에 그려진 작은 그림도 있었다. 두 아이가 나무 아래 서 있는 그림. 선은 비뚤비뚤했고 비율도 맞지 않았지만, 어린 선주는 그걸로 만족했던 것 같았다.

며칠 후,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프레젠테이션은 성공적이었다. 상사는 만족했고, 고객도 좋아했다. 하지만 선주는 13페이지의 오타를 발견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잘했어요." 동료 다온씨가 말했다. "완벽했어요."

완벽. 그 단어가 선주를 따라다녔다.

점심시간, 선주는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했지만 식욕이 없었다. 옆 벤치에는 한 여자와 어린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엄마, 이 그림 어때?" 소녀가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예쁘네. 하지만 여기 집 지붕이 조금 삐뚤어졌어."

"괜찮아요. 우리 할머니 집도 지붕이 삐뚤어졌잖아요."

여자가 웃었다. "그렇네. 네 말이 맞다."

선주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그림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선주는 또 그 공책을 꺼내 읽었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싼 사탕 가게를 찾아서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사탕을 살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어진다."

선주는 무엇을 찾아 온종일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서 뭘 하고 싶었을까. 그 질문에 선주는 답할 수 없었다.

다음 주말, 선주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부모님 집 다락방에는 더 많은 공책들이 있었다. 선주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펼쳤다. 완벽하지 않은 글씨, 완벽하지 않은 그림, 완벽하지 않은 수학 문제 풀이들.

하지만 그 안에는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호기심, 즐거움, 실망, 기쁨. 선주는 그때 퍼센트를 계산하지 않았다. 그저 살았다.

"선주야, 뭐 찾니?"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옛날 공책들이요."

아버지는 선주 옆에 앉았다.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아빠, 기억나세요? 제가 완벽한 원을 그리려고 했던 거."

"그럼. 네가 컴퍼스로 다섯 개인가 그렸지."

"여섯 개요. 근데 아빠가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완벽한 원은 머릿속에만 있다고."

"그랬나?"

"네. 그리고 95퍼센트 원도 원이라고요."

아버지가 웃었다. "현명한 아빠였네."

"근데 전 그걸 잊어버렸어요." 선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언제부턴가 100퍼센트만 찾고 있었어요. 100퍼센트 일, 100퍼센트 결과, 100퍼센트 인생."

"그리고?"

"피곤해요. 너무 피곤해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들어왔다.

"선주야, 네가 어렸을 때 나한테 물었어. 엄마가 완벽한 사람이냐고. 기억나니?"

"조금요."

"나는 그때 아니라고 했지. 70퍼센트였다가 95퍼센트였다가 한다고. 근데 말이야, 지금도 그래. 네 엄마는 완벽하지 않아. 나도 완벽하지 않고. 우리 결혼생활도 완벽하지 않아."

"그럼요?"

"그럼에도 좋아.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선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잊어버렸을까. 함께 있는 게 좋다는 그 단순한 진실을.

그날 저녁, 선주는 오래된 친구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5년 만이었다.

"선주니? 세상에, 네가 웬일이야!"

"미안해. 바쁘다고 연락 못 했어."

"괜찮아. 나도 그랬어. 어떻게 지내?"

두 사람은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승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삶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있잖아, 승희야. 우리 어렸을 때 내가 공책에 네 이름 옆에 퍼센트를 적었던 거 기억나?"

승희가 깔깔 웃었다. "그랬어? 나 몇 퍼센트였는데?"

"그날그날 달랐어. 85에서 95 사이였던 것 같아."

"지금은?"

선주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은... 퍼센트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맞아.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도 친구라는 거지."

전화를 끊고 나서 선주는 오래된 공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새로운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다시 배운다. 완벽함을 찾느라 살 시간을 잃지 말 것. 80퍼센트로도 충분하다는 것. 아니, 80퍼센트면 행운이라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지금 이 순간."

다음 날 아침, 선주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완벽을 추구하되, 완벽에 갇히지 않았다. 오타를 발견하면 고쳤지만, 그것 때문에 밤을 새지는 않았다.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저녁, 선주는 산책을 나갔다. 5월이었다. 자작나무 잎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어린 시절 창밖으로 보던 그 나무들처럼.

길을 걷다가 선주는 문구점 앞에서 멈춰 섰다. 쇼윈도에는 컴퍼스가 진열되어 있었다. 선주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컴퍼스 한 개를 샀다. 그리고 새 공책도 함께.

집에 돌아와서 선주는 원을 그렸다. 첫 번째 원은 선이 떨렸다. 두 번째는 조금 나았다. 세 번째 원을 그릴 때, 선주는 미소 지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 원 안에 작은 것들을 그렸다. 집, 나무, 사람들. 서투른 그림이었지만 선주는 만족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완벽함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담은 기록이었으니까.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의 완벽하지 않은 밤. 하지만 선주에게는 충분했다. 아니, 충분함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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