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은 8백 년을 살고도 아무것도 몰랐던 한 여자의 이야기
작가 노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기관, 해양 도시, 출산 면허 번호는 모두 허구입니다. 단, 돈이 없을 때의 그 마음과, 죽을 것 같을 때의 그 마음은 실화입니다.
1부: 구두쇠의 탄생 혹은 쪼들림의 연대기
1장. 237세의 아침
나, 한수진은 오늘도 냉동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정확히는 2389년산 냉동 오므라이스 '엄마표 감성 시리즈 — 황금 달걀 에디션'인데, 이 제품은 출시된 지 벌써 4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사먹고 있다. 왜냐하면 할인 행사 때 박스째로 사두었기 때문이다. 총 612개. 그중 오늘 먹은 것이 588번째다.
전자레인지가 '삐-' 소리를 냈다.
나는 오므라이스를 꺼내면서, 오늘이 내 237번째 생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걸 '새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지만,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237년을 살면서 생일이 237번 왔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일에 냉동 오므라이스를 먹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난 47년 동안 생일마다 냉동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아니, 정확히는 냉동 오므라이스를 사기 시작한 해부터 계속 먹었다.
창문 밖으로는 태평양이 보였다. 우리 아파트—정확히는 수심 30미터 해저 돔 주거 단지 '제3 퍼시픽 파크' D동 1127호—의 외벽은 투명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침마다 바닷물이 출렁이는 것과 가끔 지나가는 흰수염고래를 볼 수 있다. 오늘은 고래 대신 배달 드론이 지나갔다. 드론 옆구리에는 '롯데마트 해저점 — 당일배송 보장!'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나는 오므라이스를 한 숟갈 떴다.
맛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냥... 47년째 똑같다.
휴대기기에서 알림이 왔다. 발신인: 직장 상사 류백준 (198세).
[류백준: 오늘 9시에 전체 회의입니다. 지각하면 경위서 쓰는 거 알죠?]
나는 오므라이스를 입에 물고 답장을 보냈다.
[한수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198세가 나한테 경위서 타령이라니. 저 양반, 갓 스물 넘은 신입사원 취급하는 거 같아서 약이 오른다.
사실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온 지 61년이 됐다. 해양자원관리공단 제7해구 기획조정팀. 직책은 수석연구원. 연봉은 세전 4,700만 크레딧. 물가 기준으로는 괜찮은 수준이지만, 237년을 살면서 생각해보면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건 26세 때였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약 211년 동안 일했다. 50년 주기로 커리어를 갈아탔으니 이번이 다섯 번째 커리어다.
첫 번째: 26세
76세. 서울 강남 치과의사.
두 번째: 76세
126세. 수중 건축 설계사.
세 번째: 126세
176세. 화성 이주 관련 법무사.
네 번째: 176세
226세. 심해 생태계 연구원.
다섯 번째: 226세~현재. 해양자원관리공단.
사람들은 50년마다 새 커리어를 쌓는 것을 '멀티 라이프 디자인'이라 부르며 멋진 일인 양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212년 동안 계속 일한 것이다. 번아웃이 다섯 번 왔고, 이직 때마다 자격증 공부를 다시 해야 했으며, 새 직장에서는 언제나 내가 제일 어렸다.
제일 어리다고? 237살이?
맞다. 50년 단위로 새 커리어를 시작하면 다들 비슷한 연배들끼리 모이게 되는데, 우리 팀에는 300살이 넘는 선임들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류백준 팀장은 어린 축에 속하는 198세다. 바깥 세상에서는 700살 넘은 노인들이 아직도 국회의원 자리를 꽉 쥐고 있고, 170년째 대기업 회장직을 유지 중인 어르신도 계신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므라이스가 세 숟갈 남았다.
먹기가 싫어졌다. 사실 47년 전부터 이미 먹기가 싫었다. 그래도 먹는다. 612개를 샀으니까.
2장. 왜 나는 박스째로 샀는가, 혹은 트라우마의 기원
내가 이렇게 된 건 178살 때 일이다.
당시 나는 네 번째 커리어를 막 시작한 신진 심해생태 연구원이었다. 직장 동료들 틈에서 제일 어렸고, 빚은 세 번째 커리어 당시 화성 이주 브로커 사기로 탕진한 2,000만 크레딧이 남아 있었으며, 그 해 봄에 세 번째 결혼도 끝났다.
세 번째 남편 고동율은 나보다 51살 많았다. 우리는 50년 결혼 계약을 맺었지만, 계약 만료를 3년 앞두고 그가 47살 연하의 여성과 '재결합 전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그 47살 연하의 여성은 우리 결혼식 하객이었다.
고동율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수진아, 우리 계약 기간이 47년 됐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오래된 거 아니야? 50년 딱 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조용히 서류에 서명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총 612개짜리 냉동 오므라이스 박스를 주문했다. 배달비를 아끼기 위해 무게 제한에 딱 맞게, 딱 한 번만.
그때 생각이 정확히 기억난다.
돈이 없을 때는 무조건 모아야 한다. 그것밖에 없다.
당시 나는 이혼 위자료로 생활비가 빠듯했다. 월세, 연구원 등록비, 전기세, 해저 돔 관리비, 출산 면허 유지비—물론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면허 자체가 취소되면 나중에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유지는 해야 했다—를 다 내고 나면 식비로 월 8만 크레딧밖에 남지 않았다.
8만 크레딧. 612개의 냉동 오므라이스를 박스로 구매하면 47년치 아침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한 끼에 약 1,300 크레딧 꼴. 당시 해저 돔 구내식당 가격이 8,000 크레딧이었으니, 약 83%의 절약이었다.
나는 그 계산을 지금도 외운다.
3장. 오늘의 전체 회의, 또는 무덤 위의 브레인스토밍
회의실은 유리 돔 꼭대기 층에 있었다. 사방이 바다였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61년 동안 매일 봤다.
류백준 팀장이 화면을 켰다.
"자, 오늘 안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14해구 어업권 갱신 협상. 둘째, 심해 플랑크톤 추출 사업 예비 타당성 검토. 셋째—"
그가 헛기침을 했다.
"셋째, 올해 말 우리 팀의 정원 감축 문제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손을 들었다.
"몇 명이요?"
"세 명."
"우리 팀이 몇 명이죠?"
"...일곱 명."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전과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옆자리의 임재철(314세)이 나지막이 말했다. "야, 수진아. 저게 무슨 뜻인지 알아?"
"절반 자른다는 거요."
"응."
"그런데 왜 세 명이에요? 반이면 3.5명 아닌가요?"
임재철이 나를 물끄러미 봤다. "그 0.5명이 누가 될 것 같아?"
나는 내 왼쪽 반을 내려다봤다. 그냥 가만히.
류백준 팀장이 계속 말했다. "정부 정책상 해양자원관리 예산이 22% 삭감됐습니다. 이에 따라 각 팀에서 자율적으로 효율화를 진행하라는 공문이 왔고요—"
"자율적으로요?" 내가 끼어들었다.
"예."
"자율적으로 하다가 팀장님이 저를 자르시면, 그게 팀장님의 자유의지예요, 아니면 공단의 지시예요?"
"...그 부분은 법무팀에 물어봐야 할 것 같네요."
나는 팔짱을 꼈다.
좋아. 61년을 여기서 일했다. 그동안 모은 돈이 얼마더라.
나는 자동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237살. 연봉 4,700만 크레딧 × 61년 × 저축률 약 67%... 저축액은 대략 19억 크레딧. 거기에 해양 생태계 관련 특허 로열티 연 300만 크레딧 × 40년... 약 1억 2천만 크레딧. 합산하면 약 20억 크레딧.
그리고 나는 800년을 살 것이다. 앞으로 563년이 남았다.
20억을 563년으로 나누면, 연간 약 355만 크레딧을 쓸 수 있다. 월로 나누면 약 29만 크레딧. 지금 내 월 지출이 약 200만 크레딧이니까, 이론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잘릴 이유가 없다는 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일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류백준 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이 두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조용히 구경했다.
2부: 죽음이 다가오다, 혹은 예상치 못한 변수
4장. 수심 4,200미터의 사고
일주일 후, 나는 해저 탐사를 나갔다.
우리 팀의 업무 중 하나는 심해 서식지 현장 점검이다. 탐사정을 타고 수심 4,000미터 이상 지점까지 내려가, 해저 열수공 근처 생태계를 촬영하고 샘플을 채취해 온다. 보통 세 명이 팀을 이루는데, 이번에는 나와 임재철, 그리고 신입 이가온(23세)이었다.
이가온은 23살이었다. 진짜 23살. 이 세상에서 진짜로 23년밖에 살지 않은 사람. 탐사정 좌석에 앉아서 흥분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꼭 수학여행 가는 중학생 같았다.
"선배님, 열수공 근처에서는 관벌레도 볼 수 있어요?"
"응."
"관벌레가 광합성 없이도 사는 거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화학합성 생물이 지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생명일 수도 있다잖아요!"
"맞아."
"그럼 우리 인간도 사실 저런 생물의 후손일 수도 있겠네요. 생각해보면 생명이라는 건 태양 없이도 가능한 거잖아요.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관계를 맺고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임재철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얘야, 탐사 중에는 말 좀 줄여라. 집중해야 해."
이가온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아이를 잠깐 봤다. 23살. 내가 23살이었을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치과 대학 4학년. 학자금 대출 3,200만 크레딧. 아르바이트 세 개.
그때도 돈 생각밖에 없었다.
탐사정이 수심 4,000미터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이상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미세한 삐걱거림이었다. 탐사정이 오래된 모델이라 이런저런 소음이 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소리는 달랐다. 뭔가 날카롭게 찌그러지는 느낌.
임재철이 계기판을 봤다.
"수진아."
"어."
"선체 압력 이상이야."
아.
나는 일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 일초 동안 내가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냉동 오므라이스가 아직 24개 남았는데.
5장. 수압과 실존주의
"균열이에요?"
이가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 모르겠어." 임재철이 침착하게 계기판을 조작했다. "비상 부상 절차 시작한다. 수진아, 통신."
나는 이미 통신기를 잡고 있었다.
"퍼시픽 파크 관제센터, 이쪽은 탐사정 PD-77입니다. 현재 수심 4,183미터, 선체 이상 감지. 비상 부상 절차 개시합니다."
잡음.
"PD-77, 수신. 현재 통신 상태 불안정합니다. 반복해주세요."
잡음. 또 잡음.
아, 이 근방은 해저 지형 때문에 통신이 잘 안 잡히는 지점이었지.
나는 이 사실을 보고서로 세 번 작성했다. 이 구역의 통신 음영 지대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예산을 요청했다. 세 번 다 기각됐다. '비용 대비 효용 불명확'이라는 이유로.
이런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그 결정이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온 지금은, 그냥 욕이 나왔다.
"씨—"
"선배님?" 이가온이 나를 봤다.
"아니야. 통신 재시도할게."
두 번째 균열음이 났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선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소리.
수심 4,183미터.
수압은 약 420기압.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수압은 약... 생각하기 싫었다.
임재철이 부상 엔진을 최대로 올렸다. 탐사정이 느리게, 정말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탐사정 내벽을 봤다. 강화 합금. 그 안에 3명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 바깥에는 약 420기압의 물이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굉장히 단순했다. 공황도 없었고, 눈물도 없었다. 그냥, 단 하나의 문장.
살아야 한다.
이가온이 내 손을 잡았다.
"선배님, 무서워요?"
나는 그 아이를 봤다. 23살. 탐사정 안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23살짜리.
"응."
"저도요."
임재철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나도 무섭다. 셋 다 입 다물고 부상에 집중해."
그래서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탐사정은 올라갔다. 느리게. 균열음이 두 번 더 났다. 통신은 끊겼다 잡혔다를 반복했다. 이가온의 손이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쥐어짜이는 손가락이 아팠지만 놔주지 않았다.
수심 2,000미터.
수심 1,000미터.
수심 300미터.
그리고, 탐사정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6장. 살아남은 후의 그 느낌
구조선이 왔을 때, 나는 해치를 열고 바깥 공기를 마셨다.
태평양 한복판의 공기. 짜고, 차갑고, 바람 냄새가 났다. 이런 공기를 마셔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매일 해저 돔 안의 정제된 공기만 마시다가, 진짜 바깥 공기를 마시니 코가 따가웠다.
임재철이 해치 위에 앉아 하늘을 봤다. 구름이 많았다.
이가온은 탐사정 위에 올라와 펑펑 울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앉아서, 파도가 탐사정 옆구리를 치는 걸 봤다.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237년을 살았다. 앞으로 563년이 남았다. 오늘 수심 4,183미터에서 살아났다. 해저 돔에 돌아가면 냉동 오므라이스 24개가 기다리고 있다. 통장에는 20억 크레딧이 있다.
그래서 뭘 해야 하지?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가장 무서웠다. 죽을 것 같았을 때보다.
구조대원이 내게 다가왔다. 젊은 남자였다. 아마 50
60대? 요즘 50
60대는 진짜 어려 보인다.
"괜찮으세요?"
"네."
"정말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이상하게 봤다. 아마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겠지.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네, 괜찮아요. 살아서 다행이에요'라고 해야 하는 거니까. 나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어서.
3부: 돈과 생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한 구두쇠의 갑작스러운 중년 위기
7장. 유급 심리상담과 그 비효율성
해양자원관리공단은 사고 후 직원에게 심리상담 다섯 번을 무료로 제공했다.
정확히는 '무료'가 아니라 '사고 처리 복지 비용'으로 처리되는 거라 실질적으로는 공단 예산에서 나가는 것이지만, 어쨌든 내 돈에서는 나가지 않는다. 이런 걸 계산하는 버릇은 237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다.
상담사 이름은 황민호(412세)였다.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아니, 400살 넘은 사람이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지만—젊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마 에스테틱을 잘 다니는 것 같았다. 피부가 좋았다.
"사고 이후에 어떠세요?"
"잘 못 자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요?"
"아니요."
"그럼 무엇 때문에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황민호 상담사는 메모를 했다.
"사고 당시에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냉동 오므라이스가 24개 남았다는 생각이요."
메모를 하던 손이 멈췄다.
"...그게 전부예요?"
"아니요.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두 생각의 순서가 어떻게 됐나요?"
"냉동 오므라이스가 먼저요."
황민호 상담사가 나를 봤다. 나도 그를 봤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한수진 씨, 혹시 지금 본인의 삶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나요?"
"의문이요?"
"네. 삶의 방향이라든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의미가 있는지라든가."
나는 팔짱을 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물론이죠."
"237년 살면서 돈 모으고, 일하고,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또 일하고, 자격증 따고, 또 일하고, 또 모으고... 그렇게 살았는데요. 수심 4,000미터에서 올라오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그래서요?"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황민호 상담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건 상당히 중요한 인식입니다."
"중요한 건 알겠는데요." 나는 창밖을 봤다. 오늘도 고래 대신 배달 드론이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한수진 씨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원한 적 있으세요? 돈이나 생존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원한 것."
나는 생각했다.
오래 생각했다.
"...관벌레요."
"네?"
"열수공 옆에 사는 관벌레. 이번 탐사에서 사진을 못 찍었거든요. 원래 사진 찍으러 내려갔는데."
황민호 상담사가 나를 봤다. 나도 그를 봤다.
"관벌레를 촬영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존이나 재정과 무관한 순수한 욕망의 예시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쉬운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것 말고는 생각이 안 나요. 237년 동안."
상담실이 조용해졌다.
황민호 상담사가 말했다. "다음 주에 다시 오시겠어요?"
"무료로요?"
"이번 회차 포함해서 다섯 번까지는 무료입니다."
"그럼 다섯 번 다 써야죠."
8장. 임재철의 조언, 또는 314살짜리 선배의 말
임재철은 사고 다음 날 출근했다.
나는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다.
"선배, 어제 그 상황에서 오늘 그냥 출근했어요?"
"응."
"괜찮아요?"
"아니."
"그러면 왜—"
"집에 있으면 더 이상하거든."
임재철은 314세였다. 나보다 77년을 더 살았다. 결혼은 다섯 번 했고, 커리어는 여섯 번 바꿨다. 자녀는 출산 면허 취득 후 딱 두 번 사용해서 두 명을 뒀는데, 두 아이는 지금 각각 240살과 190살이다. 손자 손녀도 어느 세대까지인지 본인도 파악을 못 한다고 했다.
"수진아."
"응?"
임재철이 커피를 홀짝이면서 말했다.
"너 사고 난 날 표정 알아?"
"어땠는데요?"
"수면에 올라왔을 때, 나는 이가온이가 우는 거 봤거든. 당연하지. 23살인데 죽을 뻔했으니까. 근데 너는?"
"저는요?"
"그냥 멍하니 앉아서 파도 봤잖아."
나는 기억났다. 맞다.
"근데 그게 이상한 거예요?"
"이상한 건 아니야. 근데 그 표정이 뭔가 생각나는 게 있었어."
"뭐가요?"
임재철이 창밖을 봤다. 오늘은 고래가 지나갔다. 진짜 흰수염고래. 탐사정만 한 크기였다.
"내가 200살 때. 첫 번째 심장마비."
나는 놀랐다. "선배가요?"
"응. 그때만 해도 심장 쪽 치료가 지금만큼 좋지 않았거든. 하여튼 살았는데. 살고 나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딱 그 표정이었어, 지금 니 표정."
"어떤 표정이요?"
"멍한 건데 무서운.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아 왜 살았지' 같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알아. 왜 살았냐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냐. 그 차이."
나는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선배는 그때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했냐고?" 임재철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냥 또 일했어. 다른 방법을 몰라서."
"..."
"근데 말이야, 수진아." 임재철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나 314년 살면서 배운 거 하나 있어."
"뭐요?"
"아직 모르겠다는 거야."
나는 잠깐 그 말을 씹어봤다.
"그게 답이에요?"
"그게 답이야. 314년 살아도 아직 모르겠다. 그러면 너도 237년 살았으니까 모르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게 위로가 돼야 하는 건지 불안감이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둘 다야."
임재철은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아, 그리고."
"응?"
"정원 감축 대상자 발표 났어. 나야."
나는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저 아니에요?"
"응. 나야. 류팀장이 통보했어. 나 다음 달에 나가."
"선배가요? 왜요? 선배가 제일 오래됐잖아요—"
"오래됐으니까 나가는 거야." 임재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50년 근무했어. 다음 커리어 준비할 때 됐다고. 나 이제 7번째 커리어야."
"뭐 할 건데요?"
"몰라. 그것도 아직 모르겠어."
그는 웃고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창밖의 고래가 멀어지는 걸 봤다.
9장. 이가온과의 대화, 혹은 23살짜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이가온이 내 자리로 왔다.
사고 후 처음에는 재택근무를 했는데, 일주일 만에 출근했다.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다.
"선배님."
"응."
"저 사직서 쓰려고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무서워서요."
"일이?"
"아니요, 탐사가요. 저 솔직히 심해 탐사가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좋아해서 들어왔는데, 막상 4,000미터에서 탐사정이 뚜드득 소리 나니까... 다시는 못 할 것 같아요."
나는 이가온을 봤다. 23살. 겁먹은 23살.
"그거 당연한 거야."
"당연한 거예요?"
"응. 죽을 뻔했잖아."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은가.
"...아직 모르겠어."
이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저 탐사 중에 관벌레 이야기 했잖아요. 생명이 관계와 공생이라고요."
"응, 했지."
"탐사정에서 올라오면서 생각했어요. 저 혼자였으면 정말 미쳤을 것 같은데. 선배님 손 잡아서 살았어요."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손을 잡아서 살았다.
"가온씨가 손 잡았다고 탐사정이 올라온 건 아니잖아."
"그건 알아요. 근데..." 이가온이 조금 웃었다. "혼자 무서운 것 같아서 손 잡았는데, 선배님이 안 빼더라고요. 그래서 덜 무서웠어요."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저 사직서 안 쓸게요."
"왜?"
"지상 데이터 분석팀으로 이동 신청해볼게요. 탐사는 못 하겠지만, 데이터 분석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선배님이 찍어온 사진들 분석하는 거요."
"나 사진 못 찍었어."
"다음에 찍어오면 되죠."
이가온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봤다.
다음에 찍어오면 되죠.
당연한 말이었다. 그냥 당연한 말. 그런데 왜 그 말이 내 귀에서 계속 맴돌았는가.
4부: 냉동 오므라이스의 마지막 23개
10장. 황민호 상담사의 다섯 번째 세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무료 상담.
황민호 상담사가 물었다.
"이번 달은 어땠나요?"
"여러 가지 있었어요."
"말씀해 주시겠어요?"
"임재철 선배가 퇴사했어요. 정원 감축 대상이어서요. 이가온씨는 지상팀으로 이동 신청했고요. 저는 관벌레 탐사를 다시 나가기로 했어요."
"혼자요?"
"새 팀원이 배정됐어요. 저보다 어린 사람들로요. 제가 이번에는 제일 연장자예요."
"어떤 기분이에요?"
나는 생각했다.
"이상해요. 제가 임재철 선배 위치가 된 것 같아서."
"좋은 의미로요?"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연속되는 것 같은 느낌이요."
황민호 상담사가 메모를 했다. 이번에는 꽤 많이 썼다.
"한수진 씨, 처음 상담 때 237년 동안 의미 있게 원한 것이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응."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잠깐 창밖을 봤다. 오늘은 배달 드론도, 고래도 없었다. 그냥 파란 물이었다.
"탐사 전에 냉동 오므라이스를 하나 먹었어요."
"...네."
"612개 샀는데 24개 남았다고 했잖아요. 탐사 전날 하나 먹었으니까 23개 남았어요."
"그게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요." 나는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23개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다가, 이가온씨한테 줄까 싶었어요.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왜요?"
"그냥요. 먹으면 없어지잖아요. 47년째 먹었으니까 이제 다른 걸 먹어도 될 것 같아서."
황민호 상담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게 중요한 변화 같네요."
"그래요?"
"한수진 씨가 스스로 '없애도 된다'는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 절약이 아니라."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절약이 아니라 없애도 된다.
"...오므라이스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지금?"
"물론이죠."
물론 오므라이스 이야기다.
나는 웃었다. 오래간만에, 억지가 아닌 웃음이었다.
11장. 두 번째 탐사 준비, 혹은 새 팀원들과의 첫 만남
새 팀원은 둘이었다.
박서영(42세). 탐사 경험 15년 차. 눈빛이 예리하고 말이 적었다. 장비를 다루는 손길이 능숙했다.
정우찬(89세). 두 번째 커리어를 시작한 지 3년. 전직 건축가. 생태계 데이터를 3D 모델링으로 시각화하는 게 전문이라고 했다.
나는 탐사 전날 브리핑을 했다.
"PD-77은 폐기됐습니다. 이번 탐사는 PD-91 신형 모델로 갑니다."
"신형이면 뭐가 달라요?" 정우찬이 물었다.
"선체 압력 감지 시스템이 이중화됐고, 통신 범위가 30% 확장됐습니다."
"통신 확장은 어떻게요?"
"제가 예산 요청했어요. 이번에는 통과됐거든요."
박서영이 조용히 물었다. "지난번 사고 때문에요?"
"...네."
박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 수심은요?"
"4,200미터. 저번이랑 같은 지점이에요. 지난번에 못 찍은 관벌레 군락 촬영이 목적입니다."
정우찬이 손을 들었다.
"선배님, 혹시 지난번 사고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박서영이 옆에서 정우찬을 팔꿈치로 찔렀다. "야, 그걸 왜 물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저 심해 탐사가 좀 무서운데, 선배님은 이미 경험하셨으니까요."
나는 정우찬을 봤다. 89살. 겁먹은 89살.
"솔직히 말할게요."
"네."
"무서웠어요. 냉동 오므라이스 생각났어요."
정우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직."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브리핑을 마쳤다.
아직 모르겠다.
그 말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임재철 선배한테 배운 거다.
12장. 수심 4,200미터, 두 번째
탐사정 PD-91은 조용했다.
새 모델이라 기계음이 거의 없었다. 계기판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통신기도 업그레이드됐다. 선체 이상 감지 알림도 두 개의 독립된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했다.
박서영이 조종을 맡았다. 정우찬은 카메라와 데이터 장비를 담당했다. 나는 통신과 기록.
수심이 깊어질수록 창밖이 어두워졌다.
4,000미터. 어두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물.
4,100미터.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보였다.
열수공.
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굴뚝. 그 주변에, 관벌레들이 있었다.
길이가 1미터 이상 되는 것들도 있었다. 빛 한 점 없는 수심 4,100미터에서, 화학합성 에너지만으로 살고 있는 생물들. 태양 없이. 광합성 없이. 그냥, 열수공에서 나오는 황화수소를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미생물과 공생하면서.
"와." 정우찬이 나지막이 말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열 번.
나는 그걸 봤다.
237년 동안 심해 연구를 했다. 논문도 썼고, 보고서도 썼다. 관벌레가 어떤 생물인지 설명하라면 A4 다섯 장도 쓸 수 있다. 화학합성 공생의 메커니즘, 열수공 생태계의 에너지 사이클, 이 생물들이 지구 최초 생명체의 후손일 가능성.
그런데 지금 눈으로 보면서,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빛이 없는 곳에서. 혼자가 아니라 미생물과 함께. 압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곳에서. 그냥 살고 있는 생물들.
살고 있다.
그것밖에 안 하고 있는데. 살고 있다. 이유 없이. 목적지도 없이. 그냥 공생하면서. 관계를 맺으면서.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박서영이 물었다.
"응."
"울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나는 손으로 눈을 만졌다. 젖어 있었다.
아.
나는 그게 왜인지 한참 생각했다. 237년 살면서 관벌레 보고 운 건 처음이었다. 아마 이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감각인가. 황민호 상담사가 물었던 그것.
"선배님, 사진 충분히 찍었어요." 정우찬이 말했다. "올라갈까요?"
"잠깐만."
나는 잠깐 더 봤다.
관벌레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거기 있었다. 내가 보든 말든. 내가 237살이든 23살이든. 내 통장에 20억이 있든 말든. 내가 무서웠든 말든.
그냥 거기 있었다.
5부: 23개의 오므라이스와 그 이후
13장. 이가온에게 주는 것들
탐사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냉동 오므라이스 23개를 박스에 넣어서 이가온의 자리에 올려뒀다.
포스트잇도 붙였다.
*"아침에 먹어. 전자레인지 2분 30초. — 한수진"*
이가온이 출근해서 박스를 보고 나를 찾아왔다.
"이게 뭐예요?"
"오므라이스."
"알아요, 근데 왜요?"
"그냥. 필요 없어서."
이가온이 박스를 내려다봤다. 황금색 포장에 '엄마표 감성 시리즈 — 황금 달걀 에디션'이라고 써있는 2389년산 오므라이스.
"이거 되게 오래된 제품 아니에요? 2389년산이면..."
"47년 됐어."
"...먹어도 돼요?"
"냉동이야. 괜찮아."
이가온이 포스트잇을 봤다. 잠깐 생각하더니 웃었다.
"감사해요, 선배님."
"응."
"저 지상팀으로 이동했는데요. 선배님이 찍어온 사진들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어때?"
"신기해요. 수심 4,100미터의 관벌레들인데, 데이터로 보면 완전 다른 세계 같아요. 직접 본 거랑."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직접 보는 게 나아?"
"직접 보는 건 선배님이 하시면 되고요. 저는 데이터 보는 게 좋아요." 이가온이 씩 웃었다. "우리 둘 다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우리 둘 다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관벌레가 미생물과 공생하는 것을 떠올렸다.
빛도 없고, 압력은 엄청나고, 혼자는 살 수 없는 곳에서.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이번 달에 들은 말 중에 제일 와닿았다.
14장. 임재철 선배의 연락
임재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임재철: 야, 나 7번째 커리어 정했다.]
[한수진: 뭐요?]
[임재철: 수중 원예사.]
[한수진: ????]
[임재철: 해저 돔 안에 식물 기르는 거. 거기서는 식물에 대해 따로 가르쳐주진 않지만, 내가 키운 야채 먹을 수 있거든. 자급자족이야.]
[한수진: 선배, 314살에 원예요?]
[임재철: 응. 왜? 나이 제한 있냐?]
[한수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뭔가 갑작스럽게...]
[임재철: 야, 내가 111살 때 치과 보조로 일하다가 수중 건축 시작했고, 200살에 심장마비 겪고 법학 공부했잖아. 갑작스럽지 않은 전환이 어디 있냐.]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피식 웃었다.
[한수진: 잘하실 것 같아요.]
[임재철: 당연하지. 근데 수진아, 너는?]
[한수진: 저요?]
[임재철: 너는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잠깐 생각했다.
[한수진: 탐사 계속 할 것 같아요. 관벌레 사진 더 찍어야 해서요.]
[임재철: ㅋㅋㅋ 그게 이유야?]
[한수진: 다른 이유 있어야 해요?]
[임재철: ...]
[임재철: 아니, 없어도 되지.]
[임재철: 그나저나 오므라이스는?]
[한수진: 다 줬어요.]
[임재철: 진짜? 612개 샀다고 47년 동안 자랑했잖아.]
[한수진: 23개 남은 거 줬어요. 이가온씨한테.]
[임재철: 그 애한테? 왜?]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한수진: 그냥요. 혼자 다 먹는 게 이상한 것 같아서.]
15장. 한수진, 237세의 저녁
저녁에 나는 마트에 갔다.
냉동식품 코너. 오므라이스 구역.
'엄마표 감성 시리즈 — 황금 달걀 에디션'이 아직도 팔리고 있었다. 포장이 살짝 바뀌었지만 제품은 같았다.
옆에는 신제품들이 있었다. '해저 새우 리조또', '열수공 감성 크림 파스타', '심해 문어 볶음밥'. 이름이 요란했다.
나는 오므라이스를 한 개 집었다. 한 개만.
그리고 옆에 있는 해저 새우 리조또도 한 개 집었다. 먹어본 적 없으니까.
계산대에서 계산하면서,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박스째로 안 산 것이다. 두 개만 샀다.
할인이 적용되지 않았다. 낱개 가격.
237년 만에, 낱개 가격으로 냉동 오므라이스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태평양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해저 돔 바깥에서 보는 석양은, 물이 붉게 물들면서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다. 지상의 석양과는 다르다. 더 느리고, 더 고요하다.
나는 잠깐 거기 서서 봤다.
237년 살았다. 앞으로 563년 남았다. 통장에 20억 있다. 냉동 오므라이스 두 개 샀다. 관벌레 사진 찍었다. 탐사정이 뚜드득 소리 났다. 이가온이 손을 잡았다. 임재철이 원예사가 됐다. 황민호 상담사가 다섯 번의 상담을 마쳤다. 류백준 팀장은 아직도 경위서를 협박 수단으로 쓴다. 고동율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 고래가 오늘도 지나갔다.
그래서?
그래서. 뭐가.
나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모르겠다'가 전과 달랐다. 전에는 '모르겠다'가 불안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모르겠다'였다.
아직 모르겠다. 임재철 선배 말대로.
그런데, 아직은 괜찮을 것 같다.
에필로그: 박스가 아닌 낱개로
나는 집에 돌아와서 해저 새우 리조또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3분 30초. 오므라이스보다 1분이 더 걸렸다.
삐—
꺼냈다. 김이 났다. 새우 향이 났다.
한 숟갈 먹었다.
...괜찮네.
아주 맛있지는 않았다. 그냥 그럭저럭이었다. 냉동 리조또치고는 괜찮은 편이랄까. 아마 박스째로 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냥 혼자 저녁을 먹었다.
창밖으로는 밤이 된 태평양이 보였다. 수심 30미터 아래서 보는 밤바다는, 그냥 어두웠다. 빛이 없었다. 그런데 저 4,000미터 아래에는 관벌레들이 열수공 옆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빛 없이. 이유 없이. 그냥.
나는 숟가락을 들고 먹다가, 문득 생각했다.
다음 달 탐사에서는 관벌레 말고 다른 것도 찍어볼까.
다른 것. 뭘? 모르겠다. 가보면 알겠지.
박서영은 아마 좋아할 것이다. 정우찬은 3D 모델링이 더 복잡해진다고 투덜거릴 것이다. 이가온은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할 것이다.
류백준 팀장은 경위서 협박을 할 것이다.
임재철 선배는 수중 원예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고래는 오늘도 지나갈 것이다.
나는 리조또를 다 먹고, 냉동 오므라이스를 냉동실에 넣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그리고 그 다음 아침에는 아마 다른 걸 먹을 것이다. 뭘 먹을지는 아직 모른다.
563년이 남았다.
아직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게, 지금은 별로 무섭지 않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린 마굴리스는 말했습니다.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관계이고 공생이며 과정이라고. 관벌레는 4,000미터 아래에서 그 말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조건에서, 미생물과 관계를 맺고, 열수공과 관계를 맺고, 압력과 관계를 맺으며, 그냥 거기 있습니다.
한수진도 마찬가지입니다. 47년 동안 혼자 냉동 오므라이스를 먹으면서도, 결국 살아온 것은 임재철과, 이가온과, 황민호와, 심지어 배달 드론과도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을 때는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을 것 같을 때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과 생명으로 무엇을 할지는, 237년이 지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채로 다음 탐사를 준비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채로 냉동 오므라이스 대신 리조또를 사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채로, 옆사람의 손을 놔주지 않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일단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완
작품 정보
- 장르: SF 코미디
- 배경: 2514년, 제3 태평양 해저 돔 주거 단지 및 인근 심해
- 주인공: 한수진 (237세, 해양자원관리공단 수석연구원)
- 주요 등장인물: 임재철 (314세), 이가온 (23세), 황민호 (412세), 류백준 (198세), 박서영 (42세), 정우찬 (89세)
- 핵심 소품: 냉동 오므라이스 612개 (→ 최종 23개 증정)
- 핵심 생물: 열수공 관벌레 (Riftia pachypt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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