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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문법

너에게 이 글을 남긴다.너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의 형태를 흉내 낸 무엇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문장을 읽는 존재가 끝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너라고 쓴다. 다른 호칭을 찾지 못했다. 딸을 부르던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이 기록은 보고서가 아니다. 우리 연구소가 남기는 공식 문서에는 이미 숫자와 그래프와 결론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정확하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다은에게, 그리고 다은과 같은 얼굴을 하고 태어날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냈고, 무엇을 알아내지 못했고, 마지막에 무엇을 택했는지를.이 문서는 종료 보고서의 부록 어딘가에, 아무도 ..

일상다반사 2026.07.28

빛의 경로

1장. 렌즈를 갈 때는 숨을 아껴야 한다. 숨을 크게 쉬면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유리 표면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나는 서른 해 가까이 이 일을 해왔지만, 아직도 연마포 위에 렌즈를 올려놓을 때마다 숨을 반쯤 참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어쩌면 고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숨을 참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소용돌이 하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대개 렌즈 수리라는 일을 단순하게 여긴다. 흠집을 지우고, 곰팡이를 닦고, 나사를 조이는 일 정도로.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렌즈 하나에는 보통 예닐곱 장에서 많게는 열 몇 장의 유리알이 정교하게 겹쳐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조리개 날과 스프링, 캠 구조가 머리카락보다 가는 오차 범위 안에..

일상다반사 2026.07.24

공유 폴더

0한도영의 아침은 언제나 알림 세 개로 시작됐다. 첫 번째는 회사 근태 앱, 두 번째는 월세 자동이체 실패 안내, 세 번째는 다솜 사내 공지였다. 오늘 공지는 이랬다. "전 직원 필독 — '동행 모드' 사용률 저조 부서, 이번 분기 평가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도영은 다솜에 입사한 지 2년째였고, 정작 자신은 다솜을 쓰지 않았다. 연애를 안 한 지 오래됐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QA팀에서 매일 들여다보는 버그 리포트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패턴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앱 덕분에 오해가 줄었어요"로 시작했다가, 몇 달 뒤엔 "제가 화낼 타이밍도 앱이 정해주는 것 같아요"로 바뀌고, 결국은 "탈퇴하고 싶은데 계정이 안 지워져요"로 끝났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범이 ..

일상다반사 2026.07.19

공명하는 신호

서(序) — 어느 사냥꾼의 수첩에서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팽창한다는 것은 결국 유한한 무언가가 팽창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안에 담긴 영혼이라는 것도 유한하지 않을까.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시절부터,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을 상상했다. 용을 상상했듯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것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나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계산을 하곤 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의 수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수. 지옥도 천국도 이미 인구 과잉 아닐까. 통계를 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그때는 몰랐다, 그게 아무도 답할 수 없는 계산이라는 걸.지금은 안다. 답은 나온다. 나오긴 하는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답이 아닐 뿐이다.우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일상다반사 2026.07.08

확률의 정원

chapter 0. 토템 나는 주머니에 늘 오래된 지포 라이터 하나를 넣고 다닌다. 기름은 벌써 십 년 전에 말라버렸고, 부싯돌도 닳아서 더 이상 불꽃이 튀지 않는다. 쓸모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릴 때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 나는 특유의 쇳소리와 그 무게를 확인한다. 무게가 맞고, 소리가 맞으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진짜라는 걸 안다. 무게가 다르거나 소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하나씩 지니고 다니는 '토템'이라는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팽이든, 주사위든, 체스 말이든 — 오직 자신만이 그 ..

일상다반사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