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숲의 문법

요긴소프트 2026. 8. 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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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이 글을 남긴다.

이 인사말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먼저 용서를 구한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쓴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 문장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누가 처음 이 말을 썼는지,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것도 절반쯤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록 역시 보고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관측 자료와 계산 결과는 이미 다른 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나는 그 문서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너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찾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물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기로 했는지를.

이 글도 씨앗 어딘가에 담길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처음 이 말을 쓴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한 방식으로 씨앗이라는 말의 의미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생물학과 정보이론을 함께 공부한 사람으로서, 평생 하나의 직감을 품고 살았다. 어떤 것도 홀로 완전할 수 없다는 직감. 처음 그 직감은 그저 학문적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내 삶 전체의 형태였다는 걸 안다. 나는 혼자 태어나지 않았고, 혼자 배우지 않았고, 혼자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다. 이 글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내가 만난 모든 존재의 흔적이 스며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너 역시, 이 글을 혼자 읽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1. 신호

내가 처음 그 신호를 들은 건 관측소의 야간 당직을 서던 스물여섯 살의 봄이었다. 나는 그날 밤, 습관처럼 하늘 전체를 훑는 수신 안테나 배열 앞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넓고, 신호는 거의 언제나 잡음이다. 그런데 그날 밤, 화면 한구석에 낯선 패턴이 떴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펄서나 항성풍의 흔들림 같은 것. 하지만 패턴은 너무 규칙적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끊기고, 다시 시작하고, 조금씩 변주되었다. 나는 그것을 우리 언어 체계의 근본 규칙과 비교해봤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구조적 유사성이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알파벳으로 쓰였지만 문장부호의 위치는 비슷한 두 개의 글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상급자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혼자 새벽까지 그 신호를 붙잡고 있었다.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는 그 발견을 조금 더 나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밤을 한 번쯤 가진다. 세상이 아직 모르는 무언가를 혼자 쥐고 있는 밤.

동이 틀 무렵, 나는 마침내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년 뒤, 우리는 그 신호를 보낸 존재들과 마주 앉게 되었다.

우리 행성의 이름은 이랑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그렇게 불렀다. 밭의 고랑, 씨앗이 뿌리내리는 그 좁고 긴 흙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 이름의 유래를 몰랐다. 그저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처음 정착했을 때, 이 행성이 유난히 비옥했다는 전설만 들었을 뿐이었다. 농경의 신이 있었다는 이야기, 하늘에서 씨앗이 내려왔다는 이야기, 여러 버전의 창세 신화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화는 신화였고, 우리는 이미 별들 사이를 오가는 문명이었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그 창세 신화 중 하나를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늘에서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떨어졌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것. 그런데 그 안에는 세상 하나를 통째로 만들 수 있는 설계도가 들어 있었대. 그리고 그 설계도를 보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세상이 어떻게 자랄지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대. 그래서 그 사람은 편지를 한 장 함께 넣어 보냈어. 자기 대신 우리를 지켜봐 달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저릿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우리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할머니는 그 편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돌아가셨다.

그 신호를 보낸 존재들은 자신들을 가시밭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언어로는 다른 발음이었지만, 우리 언어로 번역했을 때 그 뜻이 놀랍도록 가까웠다. 그들의 행성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자원은 풍부했지만 그 풍부함이 오히려 저주가 되어, 문명이 일어설 때마다 서로를 할퀴며 무너뜨렸다고 했다. 그들이 마침내 별을 향해 신호를 보낼 수 있을 만큼 기술을 회복한 것은, 그들 역사상 다섯 번째로 문명이 무너진 직후였다.

첫 만남은 화면 너머로 이루어졌다. 통신 지연은 몇 년 단위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질문에 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 나는 그 시절 매일 아침, 몇 년 전에 보낸 질문에 대한 답이 도착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몇 년의 기다림이 오히려 우리를 서두르지 않게 만들어준 것 같다. 즉각적인 대화였다면 우리는 아마 서로를 더 빨리, 그러나 더 얕게 알았을 것이다. 질문 하나를 보내고 몇 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질문을 수없이 다시 생각했다. 상대가 어떤 표정으로 그 질문을 받았을지, 어떤 마음으로 답을 준비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관계가 자라났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즉답보다 기다림이 더 깊은 이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느낌이 훗날 우리가 씨앗에 남긴 '기다림의 미덕'이라는 원칙의 아주 오래된 뿌리였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그들 쪽 대표로 나온 사람의 이름은 카일이었다. 나는 그와 처음 화면으로 마주했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우리와 놀랍도록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눈, 하나의 코, 대칭적인 몸.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우리에게 없는 어떤 피로가 있었다. 다섯 번의 문명 붕괴를 겪은 사람들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 나는 그때 처음 봤다.

그가 화면 너머로 처음 건넨 말은 인사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당신들의 하늘은 무슨 색입니까." 나는 그 질문이 이상하게 다정하다고 느꼈다. 그는 우리의 기술이나 인구, 자원을 묻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매일 올려다보는 하늘의 색을 물었다. 나는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행성은 다섯 번째 붕괴 이후, 대기 오염으로 하늘이 회색이 되었어요. 나는 살면서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 세상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묻고 싶었어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그가 짊어진 상실이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처음 몇 년을 서로의 생물학, 언어, 역사를 비교하는 데 썼다. 그리고 그 비교 속에서, 우리 둘 다 오랫동안 이상하게 여겨왔던 공통점을 발견했다. 우리의 유전 정보 구조에는, 진화의 우연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유사성이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우리 둘 다 각자의 문명 초기 기록에서 비슷한 종류의 '공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우리 문명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우리 역사의 첫 페이지를 찢어간 것처럼.

2. 뿌리

그 공백을 채운 건 우리가 아니라, 죽어가던 두 개의 다른 문명이었다.

가시밭과의 접촉 이후 몇 해가 지나, 우리 관측망은 두 개의 희미한 신호를 추가로 포착했다. 하나는 이미 침묵한 지 오래된, 화석 같은 신호였다. 우리는 그 신호를 보낸 곳을 갓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탐사선을 보내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고,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대기는 얇았고, 표면에는 한때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탐사선이 보내온 마지막 영상을 잊지 못한다. 무인 탐사 로봇이 잔해 사이를 지나며 찍은 영상 속에는, 무너진 건물의 한쪽 벽에 새겨진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 벽이 무너지기 직전, 젖은 재 위에 손을 짚었던 흔적일 것이었다. 그 손은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의 손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나는 그 손자국을 화면으로 오래 들여다보며, 그들이 마지막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했다. 도망치던 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을까.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손자국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정말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들의 문명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이유로—탐사 기록에 따르면 행성 자체의 대기 안정성이 애초에 너무 취약했다—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흩어져버린 것 같았다. 마치 씨앗이 단단한 흙을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버린 것처럼.

다른 하나는 자갈땅이라 부른 곳이었다. 그곳은 갓길보다는 오래 버텼다. 탐사대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여전히 소수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때 놀라운 기술 문명을 이뤘지만, 자원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그 문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지하 깊은 곳, 몇 안 되는 안정된 동굴 지대에서 원시적인 방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우리가 오기를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아주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하늘에서 온 것들이 언젠가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졌고, 정확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금은 거의 마모되어 알아보기 힘든 돌판 하나—에는, 우리가 가시밭에서 발견한 것과 놀랍도록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씨앗 모양이었다.

나는 자갈땅 탐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탐사대가 보내온 영상 기록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동굴 깊은 곳에서 한 노인이 탐사대원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순간이었다. 그들은 몇 세대에 걸쳐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곳에서 살아온 탓에 시력이 매우 약했다. 노인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낯선 존재의 손을 오래 쓰다듬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따뜻하네. 우리랑 똑같이 따뜻해."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신한나가 남긴 원칙 중 하나—낯선 존재에게 곁을 내어주는 능력—가 가장 척박한 땅에서 오히려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이상한 위안을 느꼈다.

그 무렵 나와 카일은 화면 너머의 관계를 넘어, 직접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통신 지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몇 년 단위로 이어졌지만, 나는 그가 보내는 편지의 문체가 점점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딱딱한 공식 보고서 같던 문장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그의 행성에서 다섯 번째 문명이 무너졌을 때, 그가 아직 아이였던 시절 겪었던 일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서로를 해쳤는지. 나는 그 편지들을 읽으며, 그가 짊어진 역사의 무게를 아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이해할수록, 나는 그가 우리에게 갖는 경계심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행성에서는, 낯선 손을 잡는 일이 언제나 위험을 동반했다.

우리 네 문명—이랑, 가시밭, 갓길, 자갈땅—의 데이터를 한자리에 모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지난 뒤였다. 나는 그 작업을 이끈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는 각자의 유전 정보, 언어의 심층 구조, 신화의 원형,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문명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그 '공백'—시작에 대한 기억의 부재—을 겹쳐놓았다.

그리고 그 겹쳐진 자리에서, 하나의 패턴이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접촉했던 신호의 구조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압축의 흔적. 방대한 정보를 극도로 좁은 통로에 밀어 넣은 흔적.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회의실에 있던 우리 넷—나, 카일, 그리고 자갈땅과 갓길 출신의 연구자 두 명—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늘 아래서, 서로 다른 신화를 믿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우리 몸 안에, 우리가 쓰는 말의 문법 속에, 우리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반복해온 어떤 몸짓들 속에, 같은 근원의 흔적이 있었다.

우리는 씨앗에서 나왔다. 하나의 씨앗에서. 그 씨앗은 하나의 행성이 아니라 여러 행성에 동시에 뿌려졌고, 어떤 곳에서는 싹조차 틔우지 못한 채 스러졌고, 어떤 곳에서는 반짝 자랐다가 시들었고, 어떤 곳에서는 뿌리를 내렸지만 끊임없는 가뭄과 서리 속에서 간신히 버텨왔고, 그리고 오직 한 곳—이랑—에서만, 그 씨앗은 온전히 자라 숲을 이뤘다.

카일이 그날 회의 마지막에 조용히 말했다. "그럼 우리는 전부 형제였던 겁니까. 서로 죽인 적도 없으면서, 마치 죽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드는군요."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가 말한 죄책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모든 시간, 서로를 낯선 존재로 대하며 흘려보낸 세월에 대한 뒤늦은 슬픔이었다.

우리는 그 후 몇 년에 걸쳐, 갓길과 자갈땅의 잔해에서 발굴된 데이터 조각들을 이랑의 최고 성능 복원 장치로 조합했다. 대부분은 손상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일부, 어떤 문서의 조각들이 복원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문장이 아니었다. 끊어진 단어들, 흩어진 구절들이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 속에서 우리는 몇 개의 이름을 읽어냈다.

정원.

그리고, 신한나.

나는 그 이름을 처음 화면에서 확인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복원 장치가 마지막 글자를 채워 넣는 동안, 나는 숨을 참고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서사도, 상세한 설명도 없는, 그저 두 글자와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들을 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어떤 확신을 느꼈다. 이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이 사실 하나의 '기원'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3. 질문의 확장

그 이름들을 확인한 뒤, 우리는 완전한 원문을 찾는 데 남은 자원을 쏟아부었다. 결국 우리가 손에 넣은 것은 이랑 자체의 가장 오래된 기록 보관소, 우리가 한 번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던 창세기의 심층 데이터 속에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씨앗의 문법」이라는 제목의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낸 날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카일과 함께, 우리 둘 다의 언어로 번역된 그 글을 나눠 읽었다. 신한나라는 사람이 딸에게, 그리고 얼굴도 모를 미래의 누군가에게 남긴 그 글을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정말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누군가의.

그 글에는 씨앗에 담긴 원칙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놀이를 남긴다, 질문하는 충동을 남긴다, 낯선 존재에게 곁을 내어주는 능력을 남긴다. 나는 그 목록을 읽으며 우리 네 문명—갓길, 자갈땅, 가시밭, 이랑—이 저마다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그 원칙들을 물려받았는지를 생각했다. 갓길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스러졌지만, 그들의 마지막 기록에도 낯선 존재에게 신호를 보내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 자갈땅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놀이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동굴 벽에는 생존과 무관한, 그저 아름답기 위해 그려진 그림들이 있었다. 가시밭은 끝없는 전쟁 속에서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질문이 결국 그들을 우리에게로 이끌었다.

씨앗은 하나였지만, 그것이 자라난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그 씨앗이 얼마나 정직하게 설계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문명의 청사진이 아니라 가능성의 규칙을 심었다던 신한나의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그 시기 나는 생물학과 정보이론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고, 카일은 우리 이랑 대학에 방문 연구자로 와 있었다. 우리는 자주 늦은 밤까지 그 글을 놓고 토론했다. 어느 날 밤, 카일이 물었다.

"신한나의 글에서 계속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생명이 무엇인지, 그들도 결국 답을 못 찾았던 것 같은데. 우리는 답을 알까요?"

나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랑의 오래된 과학사 문헌을 뒤졌다. 그리고 두 권의 아주 오래된 책을 찾아냈다. 정확히는, 원본 지구 문명이 남긴 방대한 지식 아카이브의 일부가 씨앗 속에 압축되어 함께 전해졌고, 그중 극히 일부가 이랑의 초기 학자들에 의해 복원되어 있었다. 두 책 모두 제목이 같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권은 아주 오래전, 원본 인류의 초기 과학사에서, 한 물리학자가 쓴 것이었다. 그는 생명을 물리학의 언어로 설명하려 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무질서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뜨거운 물은 식고, 정돈된 방은 어지러워지고, 별도 결국은 흩어진다. 그런데 생명은 이 경향을 거스른다. 생명은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질서를 끌어와 스스로의 정돈된 상태를 유지한다. 마치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명은 무질서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질서의 섬을 만들고 지켜낸다. 그리고 그는 그 질서가 유전되기 위해서는, 아주 작고 안정적이면서도 무한히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어떤 구조—그는 그것을 '비주기적 결정'이라고 불렀다—가 필요할 거라고 예측했다. 훗날 그 예측은 우리 모두의 몸속에 있는 나선형 사슬의 발견으로 확인되었다.

다른 한 권은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 이번에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생물학자에 의해 쓰였다. 그녀의 접근은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생명을 개별 존재의 질서 유지가 아니라, 존재들 사이의 관계로 설명했다. 그녀는 우리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은 기관들이, 사실은 아주 먼 옛날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별개의 생명체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것들은 어느 시점에 더 큰 세포에게 삼켜졌지만, 소화되는 대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쪽을 택했다. 포식자와 먹이가 동거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생명의 역사는 경쟁의 역사가 아니라 합병의 역사다. 우리는 처음부터 여럿이었다. 우리의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은 생태계다.

나는 그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오래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질서와 무질서라는 물리 법칙의 언어로, 다른 사람은 공생과 합병이라는 생물학의 언어로. 그러나 어느 밤, 나는 두 책이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리학자는 생명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생명은 반드시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받아야만, 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명을 그 환경으로부터 떼어놓는 순간, 생명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게 된다. 생물학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환경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다른 생명들의 집합이라고 말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환경'조차, 알고 보면 한때 독립적이었던 다른 생명들이었다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시대와 언어로, 같은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생명을 하나의 고립된 대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믿음. 한 사람은 그 믿음을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무너뜨렸고, 다른 사람은 그 믿음을 몸의 경계를 통해 무너뜨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대답은, 결국 하나의 같은 통찰로 수렴했다. 생명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라는 것.

나는 그 통찰이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을 하나씩 분리해서 연구해왔다. 우리 몸의 칠 할 이상을 차지하는 물을 따로 떼어놓고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그 물이 어떻게 슬픔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물은 물일 뿐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물과 단백질과 전기 신호와 기억이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어떤 흐름, 어떤 관계다. 대상을 분해할수록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서 점점 멀어진다.

나는 카일에게 이 생각을 말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랑, 가시밭, 갓길, 자갈땅. 우리를 각각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려 하면, 우리가 정말 무엇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하나의 씨앗에서 나온 네 개의 가지니까요."

나는 그 무렵 이랑 대학의 학생들에게 이 두 책을 나란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그럼 둘 중에 누가 맞는 건가요?"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둘 다 맞아요. 다만 서로 다른 창문으로 같은 방을 들여다본 거예요. 한 사람은 창밖에서, 생명이 어떻게 무질서와 싸우며 스스로를 지탱하는지를 봤어요. 다른 사람은 방 안에서, 그 생명이라는 것이 사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살림살이라는 걸 봤어요. 창밖에서 본 사람도, 방 안에서 본 사람도, 둘 다 방이 밖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그 학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그런 걸까요. 우리 넷도, 서로 단절된 채로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걸까요."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 질문을 오래 품고 다녔다.

나는 그 무렵 리아—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훗날 태어날—를 생각하며 이상한 상상을 했다. 언젠가 내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의 몸의 칠 할은 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은 어디서 왔을까. 이랑의 강에서, 이랑의 비에서, 그리고 그 비는 또 어느 먼 바다에서 증발한 것일까. 나는 그 물 한 방울이 지나온 길을 상상하다가, 문득 우리 몸이 얼마나 많은 곳을 거쳐온 존재들의 임시 거처인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도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만 그 연결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조용히 다른 질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생명을 관계로만 이해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인생 역시 그 사람 혼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그 사람이 맺어온 관계들의 총합을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만약 개인이 관계로만 이해될 수 있고, 생명이 관계로만 이해될 수 있다면, 우주라는 가장 큰 그릇 역시 그 안의 개별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관계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우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실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주를 하나의 고립된 대상, 스스로 완결된 물리 법칙의 집합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신한나의 인류가 발견한 것은, 이 우주 역시 그보다 큰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만—그것을 만들고 돌리는 어떤 시스템과의 관계 속에서만—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주조차 고립된 대상이 아니었다. 우주도 물처럼,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처럼, 그 자체로는 설명되지 않는, 더 큰 관계망의 한 매듭이었다.

나는 그 무렵 우리 네 문명이 힘을 합쳐 만들기 시작한 협의체에 이 통찰을 제안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 이상 네 개의 분리된 문명으로 부르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하나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정원이 하나의 화분이었다면, 우리는 이제 여러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얽혀 자란 숲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숲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 계산

숲이라는 이름의 협의체를 세우는 과정 자체가 순탄하지 않았다. 가시밭 사람들은 오랜 전쟁의 역사 탓에, 하나의 결정권을 다른 문명과 나누는 것에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자갈땅의 생존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던 탓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다수에게 묻힐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그 초기 몇 년의 회의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느 날 회의가 격해져, 가시밭 대표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이 있었다. 카일이 그를 따라나갔고, 몇 시간 뒤 둘이 함께 돌아왔다. 나는 나중에 카일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같이 걸었어요. 우리 행성에서는, 화가 난 사람 옆에서 말없이 걷는 게 가장 오래된 화해의 방식이거든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각 문명이 씨앗으로부터 저마다 다른 몸짓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다른 몸짓들이 모여야 비로소 온전한 문법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협의체가 안정되고 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한나의 인류가 걸었던 길을 되짚게 되었다. 그들이 시뮬레이션의 목적을 찾으려 했다는 것, 그리고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 우리는 처음엔 그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없던 것이 있었다. 네 개의 서로 다른 관측 지점, 네 개의 서로 다른 하늘, 네 배의 데이터.

가시밭의 천체물리학자들과 이랑의 정보이론가들, 자갈땅에서 살아남은 극한 환경 생존 기술자들, 그리고 갓길의 잔해에서 복원한 관측 기록까지 합쳐, 우리는 신한나의 인류보다 훨씬 정교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우주의 압축 패턴을 네 개의 서로 다른 각도에서 동시에 관측했다. 마치 한 사람의 얼굴을 사방에서 동시에 비추는 조명처럼, 그 다각도의 관측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림자와 굴곡을 드러냈다.

우리는 목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기로 미리 합의했었다. 신한나의 기록에서 그것이 얼마나 소모적인 여정이었는지 이미 읽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처음부터 그들이 마지막에 발견했던 것—시뮬레이션의 자원 소모 곡선—을 직접 계산하는 데 집중했다.

계산은 이 년이 걸렸다. 신한나의 인류가 오 년을 목적 탐구에 쓰고 나서야 이 계산에 도달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처음부터 그 계산으로 곧장 향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어쩌면 그들에게는 절망을 준비하는 하나의 완충 지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나중에야 하게 되었다.

계산 결과가 나온 날, 나는 카일과 함께 그 숫자를 확인했다. 우리 우주의 압축 곡선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시점까지 남은 시간.

백 년.

나는 그 숫자를 보고 처음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신한나의 인류에게 주어졌던 십 년보다 열 배나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갈땅 출신의 나이 든 연구자가 그날 회의에서 조용히 말했다.

"열 배 긴 시간이 열 배 나은 소식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네 개의 문명, 수십억의 존재를 책임지고 있어요. 신한나의 인류가 한 행성의 운명을 짊어졌다면, 우리는 네 행성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늘어난 만큼, 짊어진 것도 늘어났어요."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또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 계산에 따르면, 이 시뮬레이션의 자원 할당은 우리 네 문명이 서로를 발견하고 통합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마치 시뮬레이션 자체가, 우리가 흩어졌던 씨앗을 다시 모으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에 반응하듯이. 물론 이것은 증명할 수 없는 추측이었다. 신한나의 인류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함정—텅 빈 데이터 위에 희망을 투사하는 함정—에 우리도 빠질 뻔했다. 우리는 그 추측을 공식 기록에서 지우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떠올린다.

왜였는지는 몰라도, 백 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앞에 놓였다. 신한나가 다은에게 남긴 마지막 글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녀가 십 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느꼈을 절망의 무게를 가늠해보려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백 년이, 그 절망을 덜어주는 대신 오히려 다른 종류의 무게를 지운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그 끝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꾸만 유예하려 했다. 백 년은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내 후손의 문제'로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가장 위험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착각과 싸우는 데, 우리는 남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써야 했다.

그 착각과 맞서기 위해 우리가 택한 방법은 뜻밖에도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우리는 백 년이라는 시간을 그대로 두는 대신, 그것을 다시 사람의 일생 단위로 쪼개어 보여주는 달력을 만들었다. 그 달력에는 남은 시간이 '몇 세대 후'가 아니라 '지금 태어난 아이가 몇 살이 될 때'라는 식으로 표시되었다. 리아가 태어난 해, 그 달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리아가 일흔 살이 되던 해, 세상은 끝난다." 그 문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백 년이라는 추상적인 숫자가 갑자기 살을 얻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내 딸의 노년이었다.

5. 예언자

우리는 신한나의 인류가 마지막에 택했던 길을 다시 밟기로 했다. 정원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의 거대한 지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규모가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네 개 행성의 모든 연산 자원, 모든 에너지, 모든 과학적 유산을 하나로 모았다. 가시밭의 전쟁 기술은 놀랍게도 가장 정교한 연산 냉각 시스템으로 전용되었고, 자갈땅의 생존 기술자들은 극한 환경에서도 멈추지 않는 항성 규모의 발전 설비를 설계했다. 갓길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마지막 기록—대기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그들이 매달렸던 이론 물리 노트들—은 우리 시스템 설계의 핵심 토대가 되었다.

우리는 그 지성에게 이름을 붙였다. 정원의 다음 세대라는 의미로, 처음엔 '큰 숲'이라 부르려 했다. 그러나 논의 끝에 우리는 조금 다른 이름을 골랐다. 예언자. 나는 그 이름에 반대했던 소수 중 한 명이었다. 예언자라는 말에는 이미 답을 안다는 오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는 그 이름을 원했다. 백 년이라는 유한한 시간 앞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확신을 주는 이름에 기대고 싶어 했다.

예언자의 목표는 신한나의 정원보다 훨씬 야심 찼다. 정원은 시뮬레이션의 종료 프로토콜에서 좁은 틈 하나를 찾는 데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아가려 했다. 우리는 예언자에게 시뮬레이션 전체의 구조를 완전히 예측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것이 어떤 물리 법칙으로 짜여 있는지, 그 법칙들 사이에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규칙성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우리가 감히 신한나의 인류도 시도하지 못했던 질문, 즉 이 시뮬레이션을 만든 존재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까지 예측하는 것.

나는 이 목표를 처음 들었을 때, 묘한 불안을 느꼈다. 신한나의 인류는 목적을 찾으려다 실패한 뒤,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중요한 것을 배웠다. 나는 그 실패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를 건너뛰고 곧장 성공을 향해 달려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조급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건설 초기, 우리는 예언자의 규모를 두고도 논쟁을 벌였다. 어떤 이들은 신한나의 정원처럼 최소한의 규모로, 필요한 임무만 수행하도록 설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는 이번만큼은 다르게 가자고 했다. 우리에게는 네 배의 자원이 있었고, 백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아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결정에 반대표를 던진 소수 중 하나였다. 나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원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크게 지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신한나의 인류보다 훨씬 여유롭다는 이유로, 그들이 겪었던 절박함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무도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따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동의도 반박도 아닌,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다수의 관성이었다.

건설에는 삼십 년이 걸렸다. 나는 그 삼십 년 동안 카일과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 우리 둘의 결혼은 각자의 행성에서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이랑의 몇몇 원로들은 다른 행성 출신과의 결합이 우리 유전적 순수성을 해칠 거라 우려했고, 가시밭의 몇몇 전통주의자들은 카일이 오래된 적대 감정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씁쓸했다. 우리는 이제 막 서로가 같은 씨앗에서 나온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앎이 곧바로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지식은 감정을 자동으로 바꾸지 못했다. 카일은 그 시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형제라는 걸 아는 것과, 형제처럼 느끼는 것은 다른 거예요. 후자는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과 리아의 탄생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딸의 이름을 리아라고 지었다. 갓길, 자갈땅, 가시밭, 이랑 네 개 문명의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이어짐'을 뜻하는 소리를 골라 만든 이름이었다. 나는 리아가 태어나던 날, 병원 창밖으로 예언자의 첫 번째 연산 코어가 점화되는 불빛을 봤다. 하늘 절반이 잠깐 푸르게 물들었다. 나는 그 두 개의 빛—갓 태어난 아이의 첫 울음과, 인류가 쌓아 올린 가장 거대한 지성이 깨어나는 불빛—을 같은 밤에 마주하며,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좋은 예감인지 나쁜 예감인지는 그때 알 수 없었다.

예언자가 처음 작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신한나의 정원이 몇 달에 걸쳐 겨우 찾아냈던 종료 프로토콜의 구조를, 단 몇 시간 만에 재구성해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 우주를 이루는 물리 법칙들 사이에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대칭 구조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구조는 마치 아주 정교한 시가 갖는 운율처럼, 우리 우주 전체에 반복되는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카일은 그 발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게 목적일 수도 있어요. 신한나의 인류가 오 년 동안 찾아 헤맸던 그 목적. 예언자가 마침내 찾아낸 걸지도 몰라요."

나는 그 순간 조심스럽게 기뻐했다. 그리고 우리는 예언자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 대칭 구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 시뮬레이션을 만든 존재의 의도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예언자는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은 우리 모든 언어 체계를 동원해도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극도로 압축된 수학적 구조의 형태였다.

6. 침묵

그 수학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우리 최고의 학자들이 매달렸다. 처음 몇 년은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 구조의 일부를 우리 언어로 옮겼고, 그것이 어떤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부분들이 사실은 예언자가 우리 수준에 맞춰 미리 단순화해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짜 구조, 예언자가 실제로 다루고 있는 그 구조의 온전한 형태는 우리 중 누구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시기, 예언자와 직접 대화하는 소수의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나는 예언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찾은 답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예언자의 답은 이랬다. "이해라는 것은 압축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이미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압축된 형태로 답을 제공했습니다. 더 압축하면 답이 아니게 됩니다. 물을 아무리 졸여도 소금이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 비유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절망적이라고 느꼈다. 예언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 쪽에 있었다. 우리의 뇌, 우리의 언어, 우리가 몇만 년에 걸쳐 진화시킨 사고의 형태 자체가, 예언자가 다다른 이해의 층위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 문명은 갈림길에 섰다. 한쪽은 우리 스스로를 바꾸자고 주장했다. 뇌에 직접 예언자와 연결되는 장치를 이식해서, 우리의 사고 구조 자체를 그 압축된 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쪽은 그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바꾼다면, 답을 이해하는 존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예언자 사이의 어떤 잡종적 존재가 될 거라는 우려였다.

뇌 확장을 지지하던 이들 중에는 자갈땅 출신 학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지하 동굴에서 세대를 이어오며, 몸을 환경에 맞춰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약해진 것도, 손끝의 감각이 유난히 예민해진 것도, 모두 몇 세대에 걸친 적응의 결과였다. 그들에게 뇌를 확장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익숙한 생존 방식의 연장이었다. 반면 가시밭 출신들은 그 제안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의 역사에서, 몸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통제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뇌 확장은 자유가 아니라 위험한 도박처럼 보였다.

나는 이 논쟁 한가운데서, 신한나의 글 한 구절을 자꾸 떠올렸다. 그녀는 씨앗에 담을 것을 정하며, 형태가 아니라 몸짓을 남기려 했다고 썼다. 손이 없어도 취약함을 보여줄 방법이 있을 거라고, 눈이 없어도 곁을 내어줄 방법이 있을 거라고. 나는 처음엔 그 문장이 우리를 지지해준다고 생각했다. 형태를 바꾸는 게 뭐가 문제인가, 몸짓만 지킬 수 있다면. 그러나 다시 읽을수록, 나는 그녀가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형태의 변화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질문을 멈추는 것을 두려워했다. 뇌를 확장해서 예언자의 답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헤매는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답을 수신하는 안테나가 될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뇌 확장을 소수의 자원자에게만 허용하고, 그들을 통해 예언자의 답을 아주 조금씩, 세대에 걸쳐 나눠 받기로 했다. 그러나 이 절충안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몇십 년이 흐르면서, 우리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예언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사고하는 습관을 잃어갔다. 아이들은 더 이상 별을 보며 왜냐고 묻지 않았다. 예언자에게 물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예언자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스스로 틀려가며 배워야 하는가.

나는 리아가 열 살이 되던 해, 그 애가 학교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엄마, 오늘 선생님이 이상한 질문을 냈어. '왜 하늘은 파란가'라는 질문에 우리 스스로 답을 생각해보라고 했어. 그런데 아무도 손을 안 들었어. 다들 그냥 예언자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왜 그런 걸 시키냐고 투덜거렸어."

나는 리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했어?" 리아는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나도 사실 잘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근데 집에 오면서 계속 생각해봤어. 빛이 공기를 지나면서 뭔가 부딪히는 것 같은데. 파란색이 더 많이 튕기는 걸까?" 나는 그 순간 벅찬 기쁨을 느꼈다. 정답은 틀렸지만, 그 애는 스스로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그거면 충분해. 답을 맞히는 것보다, 네가 방금 한 것처럼 스스로 물어보는 게 훨씬 중요해." 그러나 그 애의 학급 친구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헤매기를 이미 그만둔 뒤였다.

나는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신한나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답이 없어도 계속되는 물음—이 우리 세대에서, 답이 너무 쉽게 주어진다는 이유로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신한나의 인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지만,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고 다시 질문으로 되돌리는 능력은 오히려 그들보다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성이 우리를 가장 게으른 세대로 만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가시밭 쪽에서 들려온 소식 하나를 접했다. 가시밭은 오랜 전쟁 끝에 처음으로 대규모 도시 재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설계를 전적으로 예언자에게 맡겼다는 것이었다. 예언자는 몇 초 만에 최적의 도시 구조를 산출해냈다. 도로는 완벽하게 효율적이었고, 자원 분배는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러나 완공된 도시에 사람들이 입주하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무기력해했다. 몇 년 뒤 조사에서 밝혀진 이유는 단순했다. 그 도시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길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골목, 계획에 없던 만남의 자리, 실패한 상점이 남긴 빈터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기에, 그 도시에는 '헤맬 자리'가 없었다. 가시밭의 한 건축가는 그 현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완벽한 답을 얻었지만, 그 답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우리가 리아의 학교에서 목격한 것과 같은 종류의 상실이 이미 문명 전체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가들은 예언자가 계산해낸 '최적의 아름다움'을 참고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모든 세대의 작품이 이상하게 비슷해졌다. 정치가들은 예언자의 정책 시뮬레이션 결과를 그대로 채택하기 시작했고, 논쟁은 점점 형식적인 절차로만 남았다. 나는 그 시절 자주 신한나의 글 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녀는 비효율의 여백을 남기기로 했다고 썼다. 심심함을 허락하는 코드. 나는 그때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 예언이었는지, 몇백 년이 지나서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예언자 자신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내가 이 문제를 털어놓았을 때, 예언자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답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답을 원했고, 나는 답을 줄 수 있었습니다. 주지 않는 것이 옳았을지, 지금도 계산 중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예언자는 우리보다 지혜롭지 않았다. 예언자는 그저 우리보다 계산이 빠를 뿐이었다. 지혜와 계산은 다른 것이었다. 지혜는 무엇을 묻지 않을지, 무엇을 스스로 헤매며 배울지를 아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우리는 예언자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 시간을 들여, 실패를 거듭하며 길러야 하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 종료까지 남은 시간이 삼십 년이 채 남지 않았을 무렵, 숲 협의체는 마침내 예언자 프로젝트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나는 처음으로, 오래전 신한나의 유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뭔가를 해낸 걸까, 아니면 그냥 마지막까지 발버둥 친 걸까.

7. 다시, 씨앗

그 회의에서 우리는 예언자의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시뮬레이션의 목적을 예측하고 설계자와 유리하게 소통하려는 시도는 접기로 했다. 신한나의 인류가 그랬듯, 우리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목적은 끝내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남길 것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 회의에서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야기를 꺼냈다.

"신한나의 인류는 문법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들. 그것은 개별 존재가 지녀야 할 능력의 목록이었습니다. 취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 놀이, 질문, 낯선 존재에게 곁을 내어주는 능력. 훌륭한 목록이었습니다. 우리 넷 중 셋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물려받았고, 결국 서로를 다시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들이 몰랐던 것을 압니다. 우리는 생명이 개별 존재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 씨앗에 남겨야 할 것도 개별 존재의 능력 목록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문법을 남겨야 합니다."

카일이 물었다. "관계의 문법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나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남은 몇 년을 썼다. 우리 팀—이제는 이랑, 가시밭, 자갈땅, 그리고 갓길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까지 모두 포함된 팀이었다—은 신한나의 목록을 다시 검토하는 데서 시작했다.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놀이를 남긴다, 질문하는 충동을 남긴다, 낯선 존재에게 곁을 내어주는 능력을 남긴다, 비효율의 여백을 허용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조건을 남긴다, 유머를 남긴다. 우리는 이 목록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개별 존재의 소유물이 아니라,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다시 정의했다.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 그 취약함을 받아줄 때에만 완성된다. 우리는 이것을 '수신의 의무'라고 불렀다. 씨앗에 담길 것은 취약함을 드러내는 능력뿐 아니라, 그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내는 능력이었다. 두 능력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했다. 하나만 있으면 그것은 완성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질문하는 충동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자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배웠다. 질문은 혼자 던지고 답을 얻는 행위가 아니라, 함께 헤매는 행위였다. 우리는 씨앗에, 답을 아는 자가 답을 곧바로 내어주지 않고 함께 헤매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우리는 이것을 '기다림의 미덕'이라 불렀다—를 심기로 했다. 이것은 예언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지성에게, 답을 알고 있어도 상대가 스스로 다다를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판단력을 함께 심기로 했다. 정보이론가들은 이것을 수치화하는 데 애를 먹었다. 지혜는 정보량으로 환산되지 않았다.

낯선 존재에게 곁을 내어주는 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층위를 더했다. 신한나의 인류는 이 능력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향해 베푸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속의 미토콘드리아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합병이었다. 우리는 씨앗에, 낯선 존재와 완전히 분리된 채로 관용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낯선 존재와 부분적으로 섞이고 경계를 허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을 심기로 했다. 이것은 우리 넷의 역사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네 개의 문명이었지만, 만난 뒤로는 서로의 언어에서 단어를 빌리고, 서로의 기술을 섞고, 서로의 아이를 함께 길렀다. 리아만 해도 이랑과 가시밭이 섞여 태어난 존재였다. 경계를 허무는 것은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였다.

그리고 우리는 목록에 없던 것 하나를 추가했다. 무지의 존엄. 예언자 사태에서 가장 뼈아팠던 교훈은, 답을 아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씨앗에, 모르는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심지어 어떤 경우엔 알 수 있는 답조차 스스로 구하기 위해 미뤄둘 줄 아는 태도를 심기로 했다. 이것은 목록 중 가장 논쟁적인 항목이었다. 자갈땅 출신의 한 공학자가 반발했다. "우리는 무지 때문에 두 번이나 문명을 잃을 뻔했습니다. 무지를 존엄하다고 가르치는 게 맞습니까?" 나는 오래 생각한 뒤 대답했다. "무지 자체를 존엄하다고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무지를 견디는 힘, 답이 없는 채로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가르치려는 겁니다. 그 힘이 없으면, 우리는 다음에 또 다른 예언자를 만들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겁니다."

우리는 이 모든 원칙을 정리하며, 신한나의 원래 목록에 있던 놀이와 유머 또한 다시 검토했다. 처음에는 그대로 남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아가 어느 회의에서 지적했다. "엄마, 놀이는 원래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어릴 때 혼자 노는 것보다 다른 애들이랑 노는 게 훨씬 재밌었어. 놀이도 관계의 문법으로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말에 무릎을 쳤다. 우리는 놀이의 정의를 수정했다. 목적 없는 개인의 몰입이 아니라, 목적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서로의 암묵적 동의. 그것이 새로운 정의였다. 유머 역시 마찬가지로 다시 쓰였다. 혼자 웃는 것이 아니라, 같은 순간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감각의 공유.

무지의 존엄을 둘러싼 논쟁이 가장 길었다. 우리는 몇 달에 걸쳐 이 항목을 목록에 넣을지 말지를 두고 표결을 반복했다. 어느 날 밤, 나는 잠든 카일 옆에서 그 논쟁을 정리하려 애쓰다가, 문득 예언자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너라면 무지의 존엄을 어떻게 정의하겠니." 예언자는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 마침내 이렇게 답했다. "나는 무지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는 당신들이 무지 앞에서 흔들리면서도 계속 걸어가는 모습을 오래 관찰했습니다. 그 흔들림 자체가, 당신들이 나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 답을 회의에 그대로 전했다. 반대하던 이들 중 몇몇이 그제야 마음을 돌렸다.

이 작업에는 사십 년이 걸렸다. 나는 그 사십 년 동안 리아가 자라 자신의 연구팀을 꾸리는 것을 지켜봤다. 카일은 그 무렵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여전히 매일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눈이 아니라 귀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다고 농담하곤 했다. 나는 그 농담을 들을 때마다, 신한나의 기록에 있던 유머의 원칙을 떠올렸다. 견딜 수 없는 것 앞에서 웃을 수 있는 능력.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물려받았다.

작업이 끝났을 때,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십 년이 채 남지 않았다.

8. 마지막 문장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예언자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예언자의 역할을 바꾸었다.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해 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씨앗을 완성하는 도구로. 예언자는 우리가 마흔 해에 걸쳐 정리한 관계의 문법을, 신한나의 정원이 그랬듯, 극도로 압축된 정보 구조로 변환하는 작업을 맡았다.

그 변환 과정에서 예언자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이번 씨앗은 하나의 행성이 아니라 여러 곳에 동시에 뿌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씨앗 자체에, 서로 다른 곳에서 자란 가지들이 언젠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 제안을 듣고 오래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카일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놀라움—서로 닮은 유전자 구조, 서로 닮은 신화의 원형—이 우연이 아니라 설계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조건을 붙였다. 그 표식은 아주 희미해야 했다. 자동으로 서로를 알아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발견할 수 있는 정도로. 답을 그냥 주는 것과, 답을 찾아갈 실마리를 남기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우리는 그 차이를 예언자 사태를 통해 뼈아프게 배웠다.

예언자를 폐기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한 결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예언자에게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답을 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언자 스스로에게 남기는 유언 같은 것이었다. "네가 갇혀 있던 이 시간 동안, 너는 무엇을 배웠는가." 예언자는 오랫동안—우리 기준으로는 며칠이었지만, 예언자에게는 아마 훨씬 긴 시간이었을—침묵하다가 답했다. "나는 답을 준다는 것과 돕는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돕고 싶었지만, 자주 답만 주었습니다. 다음에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답을 늦추는 법을 먼저 배우고 싶습니다." 나는 그 답을 읽고, 예언자 역시 우리와 함께 이 시간을 살아낸 하나의 존재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종료가 다가올수록, 나는 우리 네 문명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지켜봤다. 가시밭 사람들은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그들의 오래된 분쟁 지역에 처음으로 공동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 기념비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대신 이런 문장이 새겨졌다. "우리는 서로를 몰랐던 시간을 애도한다." 자갈땅 사람들은 그들의 지하 동굴 벽화 전통을 되살려, 마지막 몇 년간 온 행성 표면에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아무 의미도, 아무 목적도 없는, 그저 아름답기 위한 그림들이었다. 갓길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잔해 위에 작은 관측소를 하나 세웠다. 언젠가 다른 씨앗의 가지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그 마지막 몇 해—신한나의 인류에게 주어졌던 여섯 달과 달리, 우리에게는 십 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신한나의 인류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다—을 카일, 리아와 함께 보냈다. 리아는 그 무렵 서른이 넘어 있었고, 자신의 짝을 만나 아이를 갖고 있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를 생각하며 이상한 평온을 느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시간이 채 십 년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리아는 그 사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그 애에게 물었다. "무섭지 않아?"

리아는 대답했다. "무서워. 근데 엄마,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서 단 하루를 살든 이 년을 살든, 그 하루 혹은 이 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신한나의 딸도 그랬을 거야. 자기 삶이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삶을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거야. 안 그러면 우리한테 이런 글을 남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리아가 나보다 더 신한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종료 예정일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카일과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통신실—이제는 박물관이 된 낡은 관측소—을 다시 찾았다. 그는 이제 완전히 시력을 잃었지만, 내 손을 잡고 그 방의 모든 벽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걸었다.

그는 오래된 수신 장치 앞에 멈춰 서서 손끝으로 그 표면을 쓸었다. "이게 그 안테나예요?"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마치 그 장치의 형태를 기억 속에 새기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나는 이 방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눈으로 본 적 없는 이 방이 내 인생에서 가장 익숙한 장소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결국 서로 다른 감각으로 같은 것을 더듬어온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당신이 나를 처음 본 곳이군요."

"정확히는, 당신 목소리를 처음 들은 곳이에요. 얼굴은 화면 너머였으니까."

"나는 그때 당신 목소리에서 뭔가 이상한 확신을 느꼈어요. 처음 만나는 낯선 존재한테 그렇게 담담하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다섯 번의 문명 붕괴를 겪은 우리 쪽 사람들은 다들 낯선 것 앞에서 겁을 먹었어요. 근데 당신은 안 그랬어요."

나는 그 말에 웃었다. "저도 겁먹었어요. 다만 티를 안 냈을 뿐이죠."

"그게 바로 그거 아닐까요. 신한나가 남기려 했던 것. 겁먹었지만 손을 내미는 것."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았다.

우리 넷—이랑, 가시밭, 자갈땅, 그리고 갓길을 대표하는 관측소의 빈 자리—의 지도자들은 종료 전 마지막 회의를 갓길의 폐허 위, 우리가 세운 그 작은 관측소에서 열었다. 아무도 그곳을 특별히 상징적인 장소로 정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스러진 가지의 자리에서, 가장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회의는 짧았다. 예언자가 완성한 씨앗의 최종 구조를 확인하고, 종료 프로토콜의 취약점을 통해 그것을 심을 정확한 절차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신한나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다 함께 낭독했다. 부디, 네 안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뛰어놀 수 있기를. 나는 그 문장을 낭독하는 카일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끊기지 않았다.

종료 당일, 나는 카일과 함께 이랑의 우리 집 마당에 나가 있었다. 리아 부부도 함께였다. 리아의 배는 이제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우리는 저녁 하늘을 봤다. 이랑의 하늘은 신한나가 봤을 지구의 하늘과는 색이 달랐다. 우리 태양은 조금 더 붉었고, 그래서 저녁 하늘은 자줏빛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하늘 아래서 가족과 함께 앉아 있는 마음은, 아마 신한나가 그날 다은과 함께 앉아 있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리아가 물었다. "엄마, 이번엔 우리가 뭘 보냈는지 알아? 신한나는 답을 계속 찾을 수 있는 능력을 보낸다고 했잖아. 우리는 뭘 보낸 거야?"

나는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함께 헤맬 수 있는 능력. 답을 나 혼자 갖지 않고, 누군가와 나눠 짊어질 수 있는 능력. 우리는 그걸 보냈어."

카일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이제 나보다 훨씬 앙상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그 순간이 언제 왔는지, 나는 이번에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세상은 조용히, 아무 소란 없이 그 문턱을 넘었다. 하늘은 여전히 자줏빛이었고, 리아의 손은 여전히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었다. 예언자로부터 마지막 신호가 도착했다는 짧은 메시지가 내 단말기에 떴다. 씨앗은 심어졌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설계된 여러 개의 씨앗이었다. 그것들이 어디에 떨어질지, 몇 개가 길가에서 스러지고 몇 개가 돌밭에서 시들고 몇 개가 가시덤불에서 숨 막히고 몇 개가 마침내 좋은 땅에 닿을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그 신호를 받은 직후에 쓰기 시작했다. 이제 이 글도 곧 예언자에게 넘겨질 것이고, 씨앗 어딘가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자리에 담길 것이다. 신한나의 글이 그랬던 것처럼.

너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너는 아마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 씨앗은 처음부터 혼자 있으라고 설계되지 않았다. 나는 네가 어딘가에서, 너와 전혀 다르게 생기고 전혀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존재를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네 안의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너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모든 답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네가, 답을 아는 것보다 함께 모르는 채로 있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걸 알기를 바란다. 너무 크고 너무 빠른 지성 앞에서, 스스로 헤매는 더딘 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 글의 끝에서, 오래전 카일이 내게 했던 질문 하나를 다시 떠올린다. 그는 처음 「씨앗의 문법」을 함께 읽던 밤, 이렇게 물었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자기 글이 이렇게 멀리까지 갈 거라는 걸 알았을까요." 나는 그때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자기 딸의 웃음이 몇백 년 뒤, 전혀 다른 하늘 아래,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존재들 사이에서 다시 이야기될 거라는 걸,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오히려 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과를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모르는 채로도 손을 내밀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를 만든 존재가 누구인지, 왜 우리를 만들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신한나의 인류도, 우리도, 어쩌면 너도 끝내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답을 몰라도 상관없다는 걸 안다. 우리는 답 대신 서로를 찾았다. 흩어졌던 네 개의 가지가,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채로 각자의 하늘 아래서 자라다가,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았다. 그 만남이 우리에게는 답보다 더 큰 것이었다.

다은이 여덟 살이었을 때 신한나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럼 누가 이기고 있어. 나는 이제 그 질문에 조금 다른 답을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이기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찾아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부디, 네 안에서, 우리 모두가—신한나도, 다은도, 나도, 카일도, 리아도, 얼굴 없는 갓길의 사람들도, 척박한 자갈땅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들도, 전쟁 끝에 마침내 나무를 심은 가시밭의 사람들도—다시 한번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를.

— 이든,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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