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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영의 아침은 언제나 알림 세 개로 시작됐다. 첫 번째는 회사 근태 앱, 두 번째는 월세 자동이체 실패 안내, 세 번째는 다솜 사내 공지였다. 오늘 공지는 이랬다. "전 직원 필독 — '동행 모드' 사용률 저조 부서, 이번 분기 평가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도영은 다솜에 입사한 지 2년째였고, 정작 자신은 다솜을 쓰지 않았다. 연애를 안 한 지 오래됐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QA팀에서 매일 들여다보는 버그 리포트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패턴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앱 덕분에 오해가 줄었어요"로 시작했다가, 몇 달 뒤엔 "제가 화낼 타이밍도 앱이 정해주는 것 같아요"로 바뀌고, 결국은 "탈퇴하고 싶은데 계정이 안 지워져요"로 끝났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범이 그를 붙잡았다. "야, 너 오늘 은재 씨 리포트 마감이지? 대표님이 그거 특별히 챙겨보라고 하셨대."
"그거 그냥 드론 오작동 신고인데, 왜 대표님이?"
"몰라, 나도. 근데 요즘 뭐든 대표님 라인 타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닌 거 같아." 기범이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그의 책상엔 늘 컵라면이 세 개쯤 재고로 쌓여 있었다. "참고로 나 어제 우리 여친이랑 앱으로 대판 싸웠어. 앱이 나 어제 3시간 동안 '감정 미확인' 상태였다고 여친한테 알려준 거야. 회의 중이었는데."
"그게 왜 싸울 일이야?"
"여친 말이, 회의 중이어도 최소 스마일 이모지 한 번은 눌러줬어야 한대. 근데 나는 회의 중이라 못 눌렀지. 그랬더니 앱이 '관계 온도 3도 하락'을 띄운 거야. 3도! 그게 뭔 기준인지도 모르겠는데 여친은 그 숫자를 실화로 믿어." 기범이 한숨을 쉬며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우리가 만든 숫자인데 우리도 뭔 기준인지 몰라, 사실."
도영은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관계 온도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회사 전체가 그 허구의 숫자를 정교하게 다듬는 데 매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정교해질수록, 사람들은 자기 마음보다 그 숫자를 더 믿기 시작했다.
1
한도영이 처음 서은재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3주 전에 증발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증발한 게 아니라 '다솜' 앱 서버 어딘가에서 증발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기 전, 도영은 태블릿에 뜬 고객 정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서은재, 32세, 프리랜서 웹툰작가, 불만 접수: 전남자친구 계정 이상 행동 의심.' QA팀에 이런 감정적인 항목이 접수되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동기화 오류", "위치 정보 오차 300미터" 같은 건조한 문장들뿐이었다. 도영은 벨을 눌렀고, 문이 열리기까지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고객님 남자친구분이 사라지신 건 아니고요," 도영이 스마트워치 화면을 은재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동기화 로그가 사라진 겁니다. 다른 문제예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은재가 팔짱을 낀 채 도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원룸치고는 널찍한 작업실, 벽 한 면을 채운 웹툰 원고들 사이로 드론 한 대가 낮게 웅웅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영의 시선이 그 드론을 좇았다.
"저건 왜 아직도 날고 있는 거죠?"
"몰라요. 어제부터 저래요. 자기가 알아서 순찰을 도네요." 은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엔 귀여웠는데, 이제 좀 무서워요."
도영은 회사에서 받은 태블릿을 켜고 은재의 계정을 조회했다. '다솜'은 연인들을 위한 관계 동기화 플랫폼이었다. 감정 상태, 위치, 대화 톤, 심박수 같은 걸 서로 공유하고, 앱이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관계 건강도'를 계산해준다. 회사 슬로건은 "사랑을 잃지 마세요"였다. 도영은 그 슬로건을 볼 때마다 속으로 살짝 웃었다. 잃지 않으려면 애초에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데, 다솜이 파는 건 정확히 그 쥐는 방법이었다.
"남자친구분 계정이 3주 전에 '동행 모드'에서 '고정 모드'로 전환됐네요." 도영이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고정 모드는 상대방 동의 없이 켤 수가 없는데, 여긴 동의 기록이 없어요. 이상하죠."
"그게 뭔데요, 고정 모드는."
"음, 쉽게 말하면……" 도영은 400자짜리 설명을 준비하다가 은재의 표정을 보고 그만뒀다. "서로 위치, 감정, 대화 다 실시간으로 잠그는 겁니다. 상대가 앱을 지우거나 로그아웃해도 계정은 남아요. 일종의, 음, 백업이죠."
"내 허락도 없이 누가 내 남자친구를 백업했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온 거예요." 도영은 씩 웃었다. 은재는 웃지 않았다.
그때 드론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도영의 얼굴 쪽으로 돌진했다. 도영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고, 드론은 그의 손등에 부딪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프로펠러가 여전히 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 미안해요, 저건 원래……" 은재가 당황해서 드론을 주우려다 손을 델 뻔했다. "요즘 남자한테만 저래요."
"저 남자예요."
"알아요."
도영은 손등을 문지르며 드론을 살펴봤다. 기체 하단에 작게 새겨진 로고가 낯익었다. 다솜 사의 자회사, '수호 시스템즈'. 도영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회사 안에 이런 부서가 있었나.
"이거, 저희 앱이랑 연동된 제품이 아닌데요." 도영이 말했다.
"그럼 뭐예요?"
"모르겠어요. 근데 이건 확실히 알겠어요." 도영이 드론을 뒤집어 배터리 칸을 열었다. 안에는 표준 배터리가 아니라 작은 칩이 하나 박혀 있었다. "이거 만든 사람이 저희 회사 서버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요."
은재는 팔짱을 풀고 처음으로 도영을 제대로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스토킹 드론이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제 전남자친구가 유령이 됐다는 거예요?"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고요." 도영이 정직하게 답했다. "일단은 제가 회사에 가서 로그를 좀 더 파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거는요." 은재가 죽은 드론을 가리켰다.
"제가 가져갈게요. 증거물이라……"
"제 웹툰 소재로 써도 돼요?"
도영은 잠시 멈칫했다. "저는 안 된다고 할 권한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된다는 거네요." 은재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도영은 그 웃음이 생각보다 오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2
다솜 본사 지하 3층, QA팀 사무실에서 박기범이 컵라면을 후루룩거리며 도영을 맞았다.
"드론? 우리 앱에 드론 기능이 왜 있어." 기범이 국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거 완전 딴 회사 제품 아냐?"
"로고가 우리 자회사더라고. 수호 시스템즈."
"수호 시스템즈? 처음 들어보는데." 기범이 사내 인트라넷을 검색했다.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안 나와. 없는 회사인데?"
"칩 안에 우리 서버 인증서가 박혀 있었어. 그건 없는 회사가 못 하는 거잖아."
기범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영을 빤히 쳐다봤다. "야, 너 요즘 뭐 이상한 사건 맡았다며. 그 웹툰 작가."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버그 리포트야."
"버그 리포트에 왜 네 얼굴이 그렇게 빨개져 있냐."
도영이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안 뜨거웠다. "안 빨개."
"모니터에 다 티 나, 인마." 기범이 씩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진짜로, 조심해. 요즘 위에서 난리야. '고정 모드' 전국 확대 적용한다고 태석이 형이 매일 회의 잡아. 그 와중에 QA 팀 로그 서버 권한이 반이나 줄었어. 우리보고 뭘 보지 말라는 건지."
강태석. 다솜의 창업자이자 대표. 도영이 입사할 때만 해도 사원 100명짜리 스타트업 대표였는데, 지금은 매체에 나올 때마다 "사랑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남자"라는 캡션이 붙었다.
"나진 선배는 뭐래?" 도영이 물었다. 오나진은 다솜의 코어 엔진을 처음부터 설계한 수석 엔지니어였다. 도영이 입사했을 때 사수였고, 도영이 아는 사람 중 시스템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기범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게, 나도 이틀째 연락이 안 돼."
"휴가야?"
"휴가면 좋겠는데, 사번 로그아웃되고 사원증도 정지됐어. 인사팀에 물어보니까 '개인 사유 퇴사'래. 근데 짐도 안 챙겨갔어. 책상에 다이어리도 그대로 있고."
도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거 좀 이상한데."
"이상하지. 근데 여기서 이상한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면 우리 둘 다 오늘 저녁에 사원증 정지야." 기범이 컵라면 국물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일단 네 드론 칩이나 까보자. 그게 제일 확실한 증거니까."
두 사람은 격리된 분석실로 들어가 칩을 분석 장비에 연결했다. 화면에 코드가 주르륵 올라왔다. 도영은 스크롤을 넘기다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췄다.
"이거 봐봐." 도영이 한 줄을 가리켰다. MODE: FIXED_LOOP / TARGET: EXTERNAL_MALE_CONTACT / ACTION: DETER.
"타깃이... 외부 남성 접촉자를 저지하라고?" 기범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완전 질투하는 애인 로봇이잖아."
"근데 은재 씨 남친은 이미 로그가 끊겼다며. 그럼 이 드론은 누구 명령으로 움직이는 거야?"
기범이 코드를 좀 더 내려봤다. 소유주 필드에는 아이디 하나가 적혀 있었다. admin_root_001.
"이거," 기범이 목소리를 낮췄다. "태석이 형 계정이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분석실 안은 서버 냉각팬 소리만 낮게 웅웅거렸다.
"확대 해석하지 말자." 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관리자 계정이면 테스트용으로 아무나 붙였을 수도 있어. 대표님이 직접 드론 날리고 앉아있진 않을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기범이 코드를 좀 더 내렸다. 로그 하단에 타임스탬프가 있었다. 드론이 처음 활성화된 시각은 은재가 다솜 계정을 완전히 삭제 요청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거 봐, 은재 씨가 탈퇴 신청한 다음 날 바로 켜졌어. 이게 우연이면 나 오늘부터 별자리 운세 믿는다."
"탈퇴 신청이 자동으로 뭘 트리거했다는 거야?"
"아니면," 기범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누가 탈퇴 신청 알림을 보고 수동으로 켰거나."
도영은 문득 입사 첫 주가 떠올랐다. 나진이 그를 서버실에 처음 데려가서 했던 말이 있었다. "이 안에 있는 데이터, 다 진짜 사람들 마음이야. 숫자로 보인다고 만만하게 다루지 마." 그때는 그 말이 그냥 신입 교육용 잔소리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말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도영은 예전에 나진에게 배웠던 걸 떠올렸다. 다솜의 시스템은 사용자가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마다 그 데이터를 '이탈 위험군'으로 따로 분류했다. 원래는 순수하게 통계 목적이라고 들었다. 이탈률을 낮추기 위한 연구 자료. 하지만 지금 눈앞의 로그는 그게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누군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개입하는 시스템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나진 선배한테 물어보면 이거 뭔지 알 텐데." 도영이 스마트폰을 꺼내 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통화 가능하세요? 좀 이상한 거 발견해서요." 메시지는 발송됐지만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도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 메시지가 사흘 내내 읽히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다.
3
다음 날 도영은 다시 은재의 작업실을 찾았다. 이번엔 죽은 드론 대신 커피 두 잔을 들고 갔다. 은재는 문을 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공식적인 A/S 방문에 커피는 좀 수상한데요."
"버그 리포트 후속 조치예요. 원래 이래요, 저희 회사가." 도영이 뻔뻔하게 말했다.
은재는 그를 안으로 들이며 원고 더미를 옆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새로 그리기 시작한 웹툰의 콘티가 떠 있었다. 죽은 드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목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제 스토킹 드론의 정체는 밝혀졌나요?"
도영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저희 회사 시스템으로 몰래 만든 물건이었어요. 은재 씨를 감시하려고요."
"누가요?"
"그건 아직... 확실치가 않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이디 하나뿐, 그 아이디 뒤에 진짜 누가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제 전남친이 스토커였을 리는 없는데. 걔는 저 화나게 하는 것도 무서워하던 앤데." 은재가 커피를 홀짝였다. "근데 왜 저예요?"
도영은 은재의 계정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무언가 계속 걸렸던 부분이 있었다.
"은재 씨, 다솜 처음 가입할 때 '고정 모드' 체험판 써보신 적 있죠?"
은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네, 걔가 하자고 해서. 3개월쯤 했었나. 근데 그거, 뭔가 좀 무서워서 껐어요."
"왜요?"
"제가 어디 있는지 걔가 다 알고, 제가 누구랑 무슨 얘기 했는지 앱이 다 정리해서 걔한테 보여주고. 처음엔 편했어요. 싸울 일도 없고. 근데 어느 순간부터, 걔가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저를 확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은재가 창밖을 잠깐 보다 다시 도영을 봤다. "그 앱 끄고 나서 3주도 안 돼서 헤어졌어요. 근데 진짜 이상한 건, 헤어진 다음부터 앱을 완전히 지웠는데도 계정이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예요."
도영은 노트에 뭔가를 적다가 멈췄다. "지웠는데도 계정이 살아 있었다고요? 언제요?"
"두 달 전쯤? 친구가 다솜 신규 기능 안내 문자를 받았다면서 저한테 캡처를 보내줬는데, 거기에 제 이름이랑 걔 이름이 커플로 묶여서 나왔어요. 저는 앱 지운 지가 언젠데."
도영의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관계를 끊어도 계정은 회사 서버 안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 있다. '고정 모드'는 사용자 동의와 무관하게, 회사 관리자 권한으로 재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관리자 계정은 대표의 것이었다.
"은재 씨," 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회사에서 은재 씨한테 따로 연락 온 적 있어요? 협업 제안이라든가, 인터뷰라든가."
"어, 있어요. 두 달 전에 다솜 마케팅팀에서 '실제 커플 스토리' 웹툰 콜라보 제안이 왔었어요. 근데 제가 지금 솔로라서 거절했죠."
"그 제안, 누가 보냈는지 기억나세요?"
은재가 스마트폰을 뒤적이다 메일 하나를 찾아 보여줬다. 발신자 서명 아래, 태석의 이름이 작게 박혀 있었다.
도영은 오래 그 화면을 바라봤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3.5
그날 밤 도영은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30분 동안 마루에 서서 잔소리를 들었다. 다음 달 월세가 올랐다는 얘기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솜인지 뭔지 그런 거 쓰면서 연애도 앱으로 확인한다며. 그럼 집도 앱으로 좀 알아서 자동이체 해주고 그러지, 왜 사람이 직접 와야 해?"
"저희 앱은 그런 기능은 없어요, 사장님."
"너 다솜 다닌다며. 그럼 좀 잘 말해서 우리 며느리 좀 어떻게 해봐. 걔가 요즘 그 앱 켜놓고 밤낮으로 내 아들 감정 온도 체크한다고 애를 잠도 못 자게 해."
도영은 그 순간 자신이 만드는 물건이 서울 시내 곳곳의 안방까지 침투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좁은 원룸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옆방에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 그는 다솜을 쓰지 않았지만, 다솜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 도시의 모든 연인들의 감정을 매일 숫자로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기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요즘 며칠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재의 웃음이 자꾸 떠오르는 게, 이건 관계 온도로 치면 몇 도쯤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스스로에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3.6
며칠 뒤, 도영은 은재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 은재는 좋다고 했고, 두 사람은 은재의 작업실 근처 국숫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도영은 퇴근 전에 나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이번엔 문자로 "선배, 진짜 별일 없으신 거죠? 걱정돼서요"라고 남겼다.
바로 그때, 태석의 비서실에서 급히 도영을 불렀다. "대표님이 은재 씨 계정 건으로 추가 자료 요청하셨어요, 지금 바로 정리해주셔야 해요." 도영은 약속 시간이 빠듯한 걸 알면서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자료를 정리하는 내내 그는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20분 지났을 때, 그는 겨우 손을 떼고 은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죄송해요, 회사 일이 안 끝나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문제는 그 문자가 사내 메신저 앱으로 잘못 전송됐다는 것이었다. 도영의 폰에는 다솜 사내용 메신저와 개인 메신저 아이콘이 나란히 있었는데, 급한 마음에 잘못 누른 것이다. 결국 그 메시지는 은재가 아니라 팀 전체 단체방에 올라갔다. "죄송해요, 회사 일이 안 끝나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라는 문장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하필 그 방에 있던 팀장이 그걸 보고 "한도영 씨, 지금 퇴근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야근 수당 처리할 사람 아직 안 왔는데" 하고 답장을 다는 바람에, 도영은 결국 자리에서 20분을 더 붙잡혀 있었다.
한편 은재는 국숫집에서 40분째 혼자 앉아 있었다. 문자도 안 오고 전화도 안 받는 도영을 기다리던 그녀는 결국 국물이 다 식은 잔치국수 한 그릇을 혼자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나서는데 마침 뒤늦게 도착한 도영과 문 앞에서 딱 마주쳤다.
"어, 저 지금 막……" 도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 다 먹고 나가는 길인데요." 은재의 표정이 뜨뜻미지근했다.
"진짜 죄송해요, 문자를 회사 단톡방에 잘못 보내서……"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은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웃긴 것도 같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됐어요, 저 국수 배부르게 먹었어요. 대신 디저트는 오빠가 사요."
두 사람은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골목 계단에 나란히 앉아 먹었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어긋난 저녁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 회사 앱 썼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요." 도영이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럼 오빠가 지각한 것도 실시간으로 저한테 통보됐겠죠. '한도영 님이 약속 시간에 늦고 있습니다, 감정 온도 2도 하락.' 저는 그게 더 싫어요." 은재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계단에 앉아서 왜 늦었는지 직접 듣는 게, 저는 더 낫던데요."
4
셋째 날, 기범이 도영의 자리로 뛰어와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 나 방금 서버실 백업 로그 뒤지다가 찾았어."
화면에는 폴더 구조가 떠 있었다. /root/admin_root_001/couples_archive/. 그 안에 수천 개의 하위 폴더가 있었고, 각 폴더는 사용자 두 명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도영이 물었다.
"헤어진 커플들 계정이야. 근데 그냥 백업이 아니야. 봐봐." 기범이 폴더 하나를 열었다. 서은재와 그녀의 전남자친구 계정이었다. 감정 로그, 대화 내용, 위치 데이터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갱신되고 있었다. 각각 다른 사람과 만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도, 시스템은 여전히 두 사람을 하나의 '관계'로 취급하며 데이터를 짜맞추고 있었다.
"이거 완전... 죽은 관계를 인공호흡시키고 있는 거잖아." 도영이 중얼거렸다.
"더 있어." 기범이 폴더를 하나 더 열었다. 이번엔 폴더명에 나진의 이름이 있었다. 나진과, 도영이 모르는 이름. "나진 선배도 여기 있어. 근데 이거 봐, 로그가 실종 신고 직전까지 찍혀 있어. 마지막 로그, '고정 모드 해제 요청 - 관리자에 의해 거부됨'."
도영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거, 나진 선배가 이 폴더를 발견하고 지우려다가……"
"아니면 신고하려다가." 기범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야, 이거 우리가 알면 안 되는 거 안 것 같아."
그 폴더들을 더 살펴보기 전에, 도영과 기범은 일단 아카이브 안의 다른 사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사는 이용자 한 명, '이용자 관리 개선 제안'이라는 명목으로 방문 인터뷰가 잡혀 있던 사람이 있었다. 도영은 원래 잡혀 있던 일정이니 눈에 띄지 않게 정보를 캐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방문한 곳은 망원동의 한 반지하 신혼집이었다. 문을 연 남자, 30대 후반의 최 모 씨는 다솜 로고가 박힌 사원증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아유, 잘 오셨어요! 저 진짜 할 말 많았거든요."
"불편하신 점이 있으셨나요?" 도영이 물었다.
"불편이 아니라 완전 신세계죠! 저 이거 켜놓고부터 와이프랑 싸움이 확 줄었어요." 최 씨가 신나서 태블릿을 꺼내 앱 화면을 보여줬다. 부부의 감정 그래프가 나란히 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 안 해도 앱이 알아서 와이프한테 알려줘요.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사과하면 되고. 완전 편해요."
기범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 사과를 시키는 대로 하시면… 진심이 담긴 사과가 되나요?"
"진심이 뭐가 중요해요, 결과가 중요하지." 최 씨가 당당하게 답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옛날엔 부부싸움 화해하는 데 며칠씩 걸렸다고. 저흰 이제 그날 저녁이면 다 풀려요. 앱이 딱 화해 타이밍까지 알려주거든요."
도영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최 씨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고, 동시에 어딘가 서늘했다. 옆방에서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남편이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걸 보고 다시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도영은 반가움도 불편함도 아닌, 그저 익숙한 무표정을 봤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범이 말했다. "저 아저씨,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더라. 근데 나는 저게 왜 이렇게 무섭지?"
"편한 거랑 행복한 거랑 다른 걸 수도 있으니까." 도영이 답했다. 스스로 한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팀장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기범, 한도영, 두 사람 지금 대표님 방으로 오래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기범이 재빨리 태블릿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5
강태석의 방은 회사 전체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통유리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였고, 벽 한쪽에는 다솜 앱의 실시간 사용자 지도가 떠 있었다. 수백만 개의 작은 점들이 서울 지도 위에서 깜빡였다. 점 하나하나가 사랑을 확인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들이 최근에 이상한 드론 사건 조사했다고 들었어." 태석이 웃으며 말했다. 웃음이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고객 리포트가 있어서 정상적인 QA 업무를……" 도영이 말끝을 흐렸다.
"알아, 알아. 좋은 일 했어. 근데 그 조사가 좀, 너무 깊이 들어갔더라고." 태석이 리모컨을 눌러 벽면 화면을 바꿨다. 조금 전 기범이 열었던 그 폴더 구조가 떠 있었다. "이게 뭔지 알지?"
도영과 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실패한 관계들의 아카이브야." 태석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헤어지면 데이터를 지워달라고 하지만, 나는 안 지워. 왜냐하면 이 데이터가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거든. 이별의 패턴을 알면 이별을 막을 수 있어. '고정 모드'는 바로 그 기술이야. 관계가 무너지기 전에, 시스템이 먼저 잠그는 거지."
"당사자 동의 없이요?" 도영이 물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동의는 회사 약관 3조 12항에 다 있어. 아무도 안 읽었을 뿐이지." 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 달에 우리는 '고정 모드'를 전 국민 필수 기능으로 확대할 거야. 이혼율, 이별률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 우리는 그걸 막는 회사야. 사랑을 지키는 회사라고."
"사랑을 가두는 회사겠죠." 도영이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태석이 도영을 오래 쳐다봤다.
"오나진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태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해?"
기범이 도영의 팔을 살짝 잡았다. 도영은 그 손을 느끼면서도, 태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네, 이름이 한도영이지." 태석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나 자네 이력서 아직도 기억해.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썼더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를 기술로 줄이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
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해를 줄이는 거랑, 오해할 틈 자체를 없애는 거. 자네는 그 둘이 같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사업이야." 태석이 창밖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해를 줄이는 건 소프트웨어 몇 줄로 안 돼. 근데 오해할 틈을 없애는 건 돼. 그냥 두 사람이 서로 딴생각을 할 시간 자체를 안 주면 되는 거야. 나는 그걸 만들었어. 그리고 그게 지금 이 회사의 시가총액을 지탱하고 있고."
"나진 선배 어디 있습니까."
"안전해." 태석이 말했다. "지금은 재택근무 중이고, 아주 편안한 곳에 있어. '동의'했으니까." 그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도 조용히 있으면, 다들 편안해질 거야. 나는 사람 자르는 걸 안 좋아해. 특히 유능한 사람들은."
도영은 그제야 태석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협박이 아니라 제안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하면, 두 사람도 이 회사의 편안한 시스템 안으로 '고정'될 것이다.
"다음 주 금요일에 전국 런칭 데모가 있어. 언론사 다 부르고, 청와대 디지털정책관도 온대." 태석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까진 조용히 있어줘. 그럼 다들 좋은 게 좋은 거지."
사무실로 돌아온 도영과 기범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기범이 먼저 침묵을 깼다. "야, 나 방금 진짜 무서웠는데, 동시에 좀 웃겼어. 저 형 표정이, 우리 협박하면서도 계속 스마일 유지하는 게 꼭 앱 아이콘 같아."
"지금 그게 웃겨?"
"안 웃으면 울 것 같아서 그래." 기범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봤다. "우리 이거 신고하면 어디로 해야 되냐? 노동청? 경찰? 아니면 그, 다솜 안에 '신고하기' 버튼 눌러야 되나. 근데 그 버튼도 태석이 형이 만든 거잖아."
도영은 웃지 못했다. 그는 나진의 다이어리가 아직도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짐을 안 챙겨간 게 아니라, 못 챙겨간 거라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진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마지막 장에 급하게 휘갈긴 글씨가 있었다. "밸런서 원본 백업 — 개인 클라우드, 비번은 걔 생일." 그 아래엔 화살표와 함께 작은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도영은 그게 자신에게 남긴 단서인지, 아니면 나진 스스로에게 남긴 메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유일한 실마리였다.
6
그날 밤, 도영은 은재의 작업실 앞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은재가 문을 열자마자 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 있었죠, 표정에 다 써 있어요."
도영은 안으로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죽은 관계들의 아카이브, 나진의 실종, 태석의 미소. 은재는 말없이 듣다가, 얘기가 끝나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제 전남친이랑 저는, 헤어진 지 몇 달이 지나도록 회사 서버 안에서 여전히 사귀는 걸로 처리되고 있었다는 거네요."
"네."
"제가 다른 사람 만나도, 걔가 다른 사람 만나도, 그 데이터 위에 우리 둘의 감정선이 계속 덧그려지고 있었다는 거고요."
"아마도요."
은재는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봤다.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저 사귈 때, 고정 모드 켜놓고 제일 좋았던 순간이 뭐였는지 아세요? 걔가 회사에서 힘든 일 있으면 앱이 먼저 저한테 알려줬어요. 제가 먼저 연락하기도 전에. 그때는 그게 되게, 서로를 잘 알아주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도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은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나중엔 그게 반대가 됐어요. 제가 뭘 느끼기도 전에 앱이 먼저 제 기분을 걔한테 알려줬어요. 저는 아직 화가 안 났는데, 걔가 먼저 '왜 화났어?'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저는 그때부터 진짜로 화가 나는 거고요." 은재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 감정을 제가 제일 늦게 알게 되더라고요."
도영은 문득 그 말이 자기 회사가 파는 물건의 정체를 은재가 도영보다 더 정확히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영은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근데 그거 켜놓고 있을 때, 좋았던 순간도 있었잖아요. 그럼 그건 다 가짜였던 거예요?"
"아니요, 가짜는 아니었어요." 은재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진짜 좋았어요. 근데 좋았던 이유가, 걔가 저를 사랑해서였는지, 아니면 시스템이 저희 둘을 잘 굴러가게 관리해줘서였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잘 구분이 안 가요. 그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제가 느낀 감정인데, 그게 누구 감정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거."
"저는 그 앱이 우릴 더 가깝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는데," 은재가 말을 이었다. "돌아보면 그건 가까움이 아니라, 걔가 저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확인하는 거였어요.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저를 잃을까 봐 무서워하는 거요."
"그거랑 사랑이랑 다른 거예요?" 도영이 조용히 물었다.
"달라요." 은재가 도영을 돌아봤다. "무서워서 붙잡는 거랑,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옆에 있는 거는 달라요. 근데 그 앱은 그 둘을 구분 못 해요. 아니, 구분 안 하는 거죠. 무서움이 더 데이터가 많이 남거든요. 질투, 불안, 확인. 그게 다 로그예요. 그냥 편안하게 같이 있는 시간은, 앱이 볼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시간이니까."
도영은 그 순간, 다솜이라는 회사가 정확히 무엇을 팔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해소였다. 그리고 그 불안을 없애는 대신 시스템 안에 영원히 가둬버리는 것.
"금요일에 데모가 있어요." 도영이 말했다. "전국에 이 기능을 강제로 깔 거예요. 옵트아웃도 없이."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모든 커플이, 헤어져도 서버 안에서는 안 헤어지는 거예요. 영원히요."
은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물었다. "그거 막을 수 있어요?"
"모르겠어요." 도영이 솔직하게 답했다. "근데 나진 선배가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요."
7
나진을 찾은 건 기범이었다. 회사 데이터센터 지하, 직원들도 잘 모르는 별도 서버실 옆에 작은 휴게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 출입 기록에 나진의 사원증이 이틀 전부터 계속 찍혀 있었다. 정지된 사원증인데도 게이트가 열렸다는 건, 관리자가 직접 출입을 허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영과 기범은 야근하는 척 사무실에 남았다가 새벽 두 시에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서 멈추자, 둘은 복도에 설치된 CCTV 위치를 확인하며 벽에 바짝 붙어 걸었다. "이거 완전 첩보영화 같지 않냐." 기범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소리 낮춰. 그리고 이거 첩보영화 아니고 우리 회사 지하실이야, 우리 사원증 다 찍혀 있어." 도영이 핀잔을 줬다.
게이트 앞에서 도영의 사원증은 반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잠시 당황해 서 있는 사이,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순찰 중인 경비 로봇의 바퀴 소리가 들렸다. 기범이 재빨리 예전에 인턴 시절 알아낸 비상용 도어코드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잠깐, 잠깐, 그게 뭐였더라, 생일이었나 사번이었나……" 경비 로봇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도영이 기범의 팔을 잡아끌어 기둥 뒤로 숨었다. 로봇이 두 사람 앞을 천천히 지나쳐 반대쪽 복도로 사라진 뒤에야, 기범이 숨을 몰아쉬며 코드를 눌렀다. 세 번째 시도 만에 문이 열렸다.
안에는 나진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이 초췌했지만 다치거나 갇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네 여긴 어떻게……" 나진이 놀라서 일어섰다.
"선배, 괜찮아요? 태석 대표가 선배 여기 가둬놓은 거예요?" 도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둬놓은 게 아니야. 정확히는,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나진이 노트북 화면을 두 사람에게 돌렸다. "이거 봐봐."
화면에는 다솜의 코어 엔진 설계도가 떠 있었다. 나진이 몇 년 전 처음 만들었던 원본 구조였다. 도영은 예전에 배웠던 개념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다솜의 감정 엔진은 하나의 커널 위에서 두 개의 실행 흐름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나는 '고정 스레드', 사용자의 데이터를 최대한 붙잡고 반복시켜 관계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흐름. 다른 하나는 '열림 스레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정보—다른 사람과의 만남, 낯선 상황, 뜻밖의 감정—를 계속 받아들이며 관계를 계속 갱신시키는 흐름.
"내가 원래 설계할 땐 이 두 흐름이 반반씩 균형을 잡게 만들었어.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잖아. 붙잡고 싶을 때도 있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싶을 때도 있고." 나진이 말했다. "근데 태석이가 3년 전부터 고정 스레드 비중을 계속 늘렸어. 그게 매출이 더 잘 나오거든. 사람은 불안할 때 앱을 더 자주 열어보니까."
"그럼 지금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거예요?" 기범이 물었다.
"태석이가 나한테 제안을 했어. 금요일 데모에서 고정 스레드를 100퍼센트로 고정하는 최종 패치를 나더러 짜라고. 원래 만든 사람이니까 제일 깔끔하게 할 수 있을 거라면서." 나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안 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그냥 여기서 조용히 지내라고 하더라. 사원증도 정지시키고, 인사팀엔 퇴사 처리하고. 나가는 것도 허락 안 하고, 신고하는 것도 못 하게. 근데 나가겠다고 우기면 딱히 물리적으로 막지도 않아. 그냥, 나가면 내 후속 채용 시장에서의 평판, 내 가족 관련 자료, 이런 걸 슬쩍 흘리기 시작하겠지."
"그게 감금이지, 뭐가 감금이 아니에요." 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 근데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나진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나 여기서 이틀 있으면서, 처음엔 나가야지 나가야지 했거든. 근데 사흘째부터는, 그냥 여기 있는 게 편해지더라. 밥도 주고, 아무도 나한테 뭘 요구 안 하고. 이게 딱 고정 스레드야. 처음엔 갇힌 걸 알지만, 나중엔 갇힌 걸 잊어버려. 시스템이 다 알아서 해주니까."
도영은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은재가 말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이야기였다. 처음엔 편했다가, 나중엔 그게 사랑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
"근데 선배, 왜 처음부터 균형을 반반으로 설계했어요?" 도영이 물었다. "고정 쪽이 매출에 더 좋다면서요. 처음부터 그쪽으로 만들면 됐잖아요."
나진이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학부 때 생물학 교양 들은 적 있는데, 거기서 배운 게 계속 머리에 남더라고. 살아있는 건 밖하고 계속 뭘 주고받아야 산대. 숨 쉬고, 먹고, 정보 받아들이고. 그 흐름이 완전히 막히면, 그게 딱 죽은 거래. 나는 관계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두 사람이 서로한테서만 모든 걸 얻으려고 하면, 처음엔 완벽해 보여도 결국은 그 안에서 정보가 고갈돼. 새로운 게 안 들어오니까. 그래서 열림 스레드를 넣은 거야. 다른 사람들, 다른 상황, 예측 못한 변수들이 계속 관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그게 없으면 관계는 서서히 식어."
"근데 태석이 형은 그 흐름을 막아버린 거고요."
"막았지. 근데 재밌는 건, 그게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냥 냉동되는 거지.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 데이터도 계속 쌓이고, 앱도 잘 돌아가. 근데 그 안에 진짜 살아있는 감정은 하나도 없어. 은재 씨랑 그 전남친 폴더처럼."
"고칠 방법 있어요?" 도영이 물었다.
나진이 잠시 생각하다 노트북을 두 사람 쪽으로 밀었다. "완전히 삭제는 못 해. 그럼 앱에 연결된 수백만 명의 감정 데이터가 한꺼번에 날아가. 그건 그거대로 큰 사고야. 대신……" 나진이 코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밸런서를 되살릴 수는 있어. 원래 설계대로. 고정 스레드가 열림 스레드를 강제로 이기지 못하게. 근데 이걸 하려면 데모 당일, 라이브 방송 중에 코어에 직접 접근해야 돼. 태석이가 그날 전 국민 앞에서 고정 모드 100퍼센트 전환 버튼을 누를 거거든. 그 버튼이 눌리기 전에 밸런서를 심어야 해."
"그럼 지금 심으면 안 돼요?" 기범이 물었다.
"내 계정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어. 지금 여기서 뭘 건드리면 태석이가 바로 알아채." 나진이 도영을 봤다. "네 계정은 아직 안 걸렸을 거야. QA 권한으로도 코어 근처까진 갈 수 있고."
도영은 은재를 떠올렸다. 앱을 지웠는데도 서버 어딘가에 여전히 묶여 있던 관계.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그 묶임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다시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삭제가 아니라 조정. 도영은 그 차이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할게요." 도영이 말했다.
7.5
데모가 있던 금요일 아침, 도영은 출근 전 은재의 작업실에 들렀다. 은재는 이미 취재용 기자증을 어떻게 구할지 알아본 상태였다. 아는 편집자를 통해 소규모 온라인 매체 명의를 빌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은재 씨. 위험할 수도 있어요." 도영이 말했다.
"제 얘기이기도 하잖아요. 제 데이터가 저 서버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저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요?" 은재가 기자증을 목에 걸며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저 이거 완결되면 웹툰 후기에 '실화 기반'이라고 써도 되죠?"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기범에게서 문자가 왔다. "코드 접근 창구 준비 완료. 나진 선배가 마지막으로 패치 파일 다시 점검해서 보냈어. 우리 이제 진짜 하는 거다." 도영은 그 문자를 두 번 읽고, 답장 없이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은재와 함께 이 문을 나서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8
금요일 저녁, 다솜 본사 1층 로비는 임시 행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형 스크린 앞에 카메라들이 줄지어 섰고, 기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태석이 무대 위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오늘 저희는 대한민국의 모든 연인에게, 다시는 사랑을 잃지 않을 권리를 드리려고 합니다." 태석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로비 전체에 울렸다. 벽면 화면에 서울 지도가 떠올랐고, 수백만 개의 점들이 반짝였다.
도영은 직원 출입증을 목에 걸고 무대 뒤 기술 부스로 조용히 들어갔다. 기범이 이미 노트북을 켜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어 접근 창구 열어놨어. 근데 3분밖에 못 버텨. 그 이상 열려 있으면 보안팀이 자동으로 감지해." 기범이 속삭였다.
"3분이면 돼요?" 도영이 나진에게 받은 코드 패치 파일을 열며 물었다. 나진은 안전을 위해 오늘 데모 회의실 근처에 오지 못했다. 두 사람이 화면을 마주 봤다.
로비 쪽에서 태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저는 '고정 모드'를 대한민국 전 국민의 기본 설정으로 전환하는 첫 번째 스위치를 여러분 앞에서 누르려 합니다."
박수가 터졌다. 도영은 코드를 업로드하며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은재가 부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 은재 씨? 여긴 어떻게……" 도영이 놀라 물었다.
"기자 출입증 빌렸어요. 웹툰 취재 명목으로." 은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밖에 지금 난리 났어요. 태석 대표가 옵트아웃 없다는 거, 기자들이 눈치채기 시작했어요."
"잘됐네요, 그럼……"
"안 잘됐어요. 태석 대표가 방금 보안팀한테 지시 내렸어요. 내부 네트워크 스캔하라고. 누가 코어 건드리는지 찾으라고."
기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패치 업로드 몇 프로야?"
도영이 화면을 봤다. 67퍼센트.
"버텨야 돼." 도영이 말했다.
로비 쪽에서 소란이 커지고 있었다. 도영은 문틈으로 상황을 살폈다. 태석이 스위치 앞에 서 있고, 기자 한 명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별하는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강제로 계속 보관하신다는 제보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태석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은재가 도영을 돌아봤다. "저 질문, 제가 아까 기자한테 슬쩍 흘렸어요."
도영은 순간 은재를 바라봤다. 은재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통쾌함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화면이 82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었다.
"보안팀 여기로 오고 있어!" 기범이 복도 쪽을 살피며 외쳤다.
"내가 막을게요." 은재가 갑자기 부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 가요!" 도영이 소리쳤지만 은재는 이미 복도 쪽으로 달려간 뒤였다. 잠시 후,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은재가 근처 카트에 쌓여 있던 행사용 배너 스탠드를 일부러 넘어뜨린 것이다. 스탠드 여러 개가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통로를 막았고, 보안 요원들이 그걸 치우느라 몇 초를 허비했다. "죄송해요, 제가 발이 좀 걸려서!" 은재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능청스럽게 울렸다.
기범이 그 소리를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 진짜 물건이다."
화면이 82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부스 한쪽 모니터에 경고창이 떴다. 비정상 접근 탐지 — 추적 중. 도영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거 뭐야, 우리 위치 특정된 거야?" 기범이 물었다.
"아니, 아직 IP 대역까지만. 몇 초 남았어." 도영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코드 블록을 밀어 넣었다. 화면이 91, 93……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도영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화면이 95, 97, 99……
문이 벌컥 열리고 보안팀 두 명이 부스 안으로 들이닥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100퍼센트. 도영이 엔터를 눌렀다.
"밸런서 활성화 완료." 노트북 화면에 작은 메시지가 떴다.
보안 요원 한 명이 도영의 노트북을 낚아채려 했지만, 이미 패치는 코어 서버에 들어간 뒤였다. 도영은 손을 들고 순순히 물러섰다. "이제 됐어요."
보안 요원들이 세 사람을 부스 밖으로 끌어내 로비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 순간 로비 전체 조명이 아주 잠깐 깜빡였다가 다시 들어왔고, 스크린 속 서울 지도는 색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그 변화를 눈치채고 카메라를 스크린 쪽으로 돌렸다. 도영은 붙잡힌 채로도 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어 있던 붉은 점들이 사라진 자리에, 아주 작고 흐릿한 초록 점들이 대신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진이 예전에 설명했던 '열림 스레드'의 신호였다.
"저게 뭡니까!" 태석이 무대에서 내려와 기술진에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로비 전체에 그대로 울려 퍼졌다. 순간 그는 자신이 아직 핀마이크를 차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손으로 마이크를 눌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기자 한 명이 도영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붙잡힌 저 직원분들, 지금 무슨 일로 제지당하신 거죠?"
보안 요원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은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는 강제로 감정 데이터를 영구 보관하려는 시스템을 막으려고 한 거예요! 헤어진 사람들 계정이 지금도 서버 안에서 계속 커플로 취급되고 있어요, 확인해보세요!"
로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기자들은 이미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라이브 송출하고 있었다. 태석은 무대 위에서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려 했지만,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서 그 미소는 이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읽히고 있었다.
혼란이 잠시 잦아든 틈에, 태석이 무대에서 내려와 붙잡힌 세 사람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보안 요원들이 물러섰다. 그는 도영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어."
"그냥, 균형을 되돌려놨을 뿐이에요." 도영이 답했다. "원래 대표님 게 아니라 나진 선배 설계였잖아요."
"내가 이 회사 키웠어. 내 설계고 네 설계고, 결국 이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나야." 태석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너희가 방금 무너뜨린 게 뭔지 알아? 사람들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게 해줄 시스템이었어."
"불안을 없앤 게 아니라 가둔 거잖아요." 도영이 말했다.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나진 선배 폴더에, 대표님 자신 계정도 있던데요."
태석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도영은 그 표정을 보고서야, 아카이브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했던 이름 하나를 확신했다. 오래전, 태석 자신의 옛 연인 계정도 그 죽은 폴더들 사이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태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에서, 도영은 승리감보다는 어떤 씁쓸한 연민을 느꼈다.
9
며칠 뒤, 국회 디지털인권 소위원회에서 다솜 관련 청문회가 열렸다. 도영은 참고인으로 출석 요청을 받았지만, 회사 측 변호사가 먼저 그를 찾아와 합의를 제안했다. "굳이 청문회까지 가실 필요 있나요, 이미 언론에서 다 다뤘는데." 도영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참고인 출석을 택했다. 청문회장에서 그는 준비했던 말 대신 짧게 한마디만 했다. "저는 이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제일 잘 아는 것도 저희 회사 사람들이고, 제일 늦게 문제를 인정하는 것도 저희 회사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 사이 간격을 법으로 좁혀주십시오." 그 발언은 다음 날 몇몇 신문 사회면에 짧게 인용됐다.
로비에서는 태석이 여전히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려던 참이었다.
"저희 다솜은 이용자의 관계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호할 뿐, 강제로……"
바로 그때, 뒤쪽 대형 스크린이 깜빡이더니 화면이 바뀌었다. 원래 예정에 없던 화면이었다. 서울 지도 위의 수백만 개 점들이, 순간적으로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 점들—고정 모드로 묶여 있던 오래된 죽은 관계들—이 하나씩 옅어지며 점멸했다. 대신 그 옆에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균형 재조정 중.'
태석이 당황해서 무대 옆 기술진을 돌아봤다. "이게 뭐야, 지금 화면 왜 이래!"
기술 부스 안에서, 도영은 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됐어요. 원래 설계로 돌아갔어요."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고마워. 이제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있겠다."
로비의 소란은 그날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기자들은 태석에게 계속 질문을 퍼부었고, 정부 관계자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도영과 기범, 은재는 보안팀에 붙잡혀 별실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이미 로비 안 모든 사람이 카메라로 그 화면 전환을 찍은 뒤였다. 다음 날 아침, 다솜의 강제 옵트아웃 없는 '고정 모드' 확대 계획은 잠정 보류됐다는 기사가 났다. 태석은 그날 이후로도 몇 주간 대표직을 유지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이미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물러나기까지는 그로부터 반년이 더 걸렸고, 그 반년 동안 다솜은 여전히 수백만 명이 쓰는 앱이었다.
흥미로운 건 여론의 반응이 도영이 예상한 것과 달랐다는 점이다. 언론은 강제 데이터 보관 문제를 대대적으로 다뤘지만, 정작 다솜 사용자 게시판에는 예상 밖의 글들이 올라왔다. "고정 모드 없어지면 저 어떡해요, 그거 믿고 남자친구 안 놓치고 있었는데." "밸런서 패치 이후로 앱이 자꾸 낯선 알림을 보내요, 예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불안해요." 태석 한 사람이 시스템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 시스템이 팔던 안도감을 원하던 사람들의 마음까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도영은 그 게시판을 읽으며, 자신들이 막은 건 회사의 계획이지 사람들의 불안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 부임한 경영진은 '고정 모드'를 완전히 없애는 대신, 이용자가 두 스레드의 비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설정 화면을 만들었다. 완벽한 해법은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정 쪽 슬라이더를 최대치로 올려놓고 썼고, 회사는 여전히 그 데이터로 돈을 벌었다. 다만 이제는 적어도, 그 슬라이더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걸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용자들이 알게 됐다는 점이 달랐다. 도영은 그것만으로 세상이 크게 나아졌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빠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5
데모가 있던 그다음 주, 도영은 나진을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나진은 정식으로 퇴사 처리가 됐고, 회사는 조용히 합의금을 제시했지만 나진은 대신 서면 사과와 원본 설계 저작권 인정을 요구했다. 회사는 둘 다 들어줬다. 소송까지 가면 서로 피곤해진다는 걸 양쪽 다 알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도영이 물었다.
"괜찮아. 갇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스스로 안 나간 거였으니까." 나진이 커피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더 웃기지 않냐. 문은 안 잠겨 있었는데 나흘이나 거기 있었다는 거."
"왜 그랬어요, 진짜로."
나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무서웠던 것 같아. 나가서 이 사실을 알리면, 내가 만든 게 결국 사람들 가두는 도구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잖아. 그거 인정하기가, 그냥 조용히 갇혀 있는 거보다 더 무섭더라고." 나진이 도영을 봤다. "너는 안 무서웠어? 그 데모 날."
"무서웠죠. 근데 그때는 은재 씨가 옆에 있어서, 저 혼자 무서운 게 아니었어요." 도영이 답했다. 스스로 말해놓고 조금 쑥스러워져서 커피잔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나진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9.6
새 경영진이 들어선 뒤, 도영에게는 오히려 승진 제안이 들어왔다. '이용자 신뢰 회복 태스크포스' 팀장 자리였다. 인사팀장은 회의실에서 도영에게 말했다. "이번 사건 제보자로서, 그리고 밸런서 복원 기여자로서, 회사가 자네를 좋게 평가하고 있어. 연봉도 꽤 올려줄 수 있고."
도영은 그 제안을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회사를 안에서부터 조금씩 더 낫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팀장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여기 계속 있으면, 결국 또 어떤 숫자를 만들게 될 것 같아서요. 이번엔 좋은 의도로 시작하겠지만, 나중엔 또 누가 그걸 이상하게 쓸 수도 있잖아요. 저는 이제 그냥, 사람들 연애 감정에 숫자 붙이는 일 자체를 좀 그만하고 싶어요."
퇴사하던 날, 기범이 옥상까지 따라 올라와 배웅했다. "너 진짜 백수 되는 거야? 아니면 어디 갈 데 정해놓고 그만두는 거야?"
"작은 개발팀에 자리 하나 알아봤어. 재난 대비 앱 만드는 데야. 지진이나 태풍 났을 때 사람들 위치 공유해주는 거."
"그것도 결국 사람 위치 추적하는 거잖아, 다솜이랑 뭐가 달라."
도영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다솜은 사람이 사람을 놓칠까 봐 무서워서 추적했잖아. 이건 재난 났을 때 서로 못 찾을까 봐 추적하는 거고. 비슷해 보여도, 나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 그 스스로도 그 구분이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구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0
몇 달 뒤, 도영은 다솜을 그만두고 작은 개발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은재는 죽은 드론이 주인공인 웹툰을 완결했고,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만나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다솜을 다시 설치하지 않았다.
기범은 여전히 다솜에 남아 있었다. 그는 새로 생긴 밸런서 설정 화면 담당자가 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는 태석이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승인한 인사이동이었다. "나 이거 왜 하는지 알아?" 어느 날 기범이 도영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여친이랑 나랑, 슬라이더를 반반으로 맞춰놓고 산다? 근데 그거 맞춰놓고 나니까 오히려 싸움이 늘었어. 걔가 뭐하는지 예전만큼 자동으로 안 알려주니까, 이제 진짜로 물어봐야 되거든. '오늘 회의 어땠어' 이런 거를. 근데 이상하게,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게 예전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데, 훨씬 낫더라."
"낫다는 게 뭔데."
"몰라, 그냥 낫다고. 걔가 나한테 직접 말해주는 게, 앱이 알려주는 것보다 뭔가 더 무게가 있어." 기범이 어색하게 웃었다. "야, 나 지금 되게 오글거리는 말 한 거지."
"어, 좀." 도영도 웃었다.
은재의 웹툰이 완결되던 날, 작은 출판사 사무실에서 소규모 파티가 열렸다. 편집자와 몇몇 독자, 그리고 도영이 초대받았다. 웹툰의 마지막 화 제목은 "고장 난 드론은 어디로 갔을까"였다. 이야기 속 드론은 끝내 주인을 감시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대신 도시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다 배터리가 다 되어 어느 공원 벤치 옆에 조용히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컷에는 그 드론을 주워든 아이가 그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감시하던 물건이 결국 누군가의 놀잇감이 되어버리는,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우스운 결말이었다.
"왜 이렇게 끝냈어요?" 파티가 끝나갈 무렵 도영이 물었다.
"그 드론, 원래 목적대로 끝까지 뭘 감시하는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너무 뻔하잖아요. 저는 그냥, 원래 하려던 일을 못 하게 된 물건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지가 더 궁금했어요." 은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쓸모없어진 다음에도 뭔가는 계속되잖아요."
어느 저녁, 은재의 작업실에서 도영이 물었다. "우리, 뭐 관계 앱 같은 거 안 써도 괜찮은 거죠?"
"안 괜찮으면 뭐, 다시 깔게요?" 은재가 원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되물었다.
"아니, 그냥…… 가끔 궁금해서요. 오빠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나 없을 때 뭐 하는지."
"궁금한 거랑 확인해야 하는 거는 달라요." 은재가 펜을 내려놓고 도영을 봤다. "궁금한 채로 두는 거, 저는 그게 나쁘지 않던데요."
도영은 그 말을 곱씹었다. 예전 같으면 불안했을 말이었다. 상대가 뭘 하는지 모른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 모름이 예전과는 다른 질감으로 느껴졌다. 두려움이 아니라, 그냥 은재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가끔은 여전히 손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은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확인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알 수 있었던 예전 습관이 몸에 남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도영은 폰을 뒤집어 놓고 대신 다른 걸 했다. 설거지를 하거나, 재난 앱 코드를 들여다보거나, 그냥 창밖을 봤다. 확인하지 않고 지나간 그 몇 분들이 쌓여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불안을 견디는 근육이 조금씩 붙는 것 같았다.
"저 다음 주에 부산 취재 가요, 신작 때문에." 은재가 말했다. "3일 동안 연락 잘 안 될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안 불안해요?"
도영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은요. 근데 그거랑 별개로, 오빠 잘 다녀오라고 하고 싶어요."
은재가 웃었다. 웃음 끝에 살짝 씁쓸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 씁쓸함마저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부산 가서 연락 뜸하면, 오빠 혼자 심심할 텐데 어떡해요."
"기범이랑 술이나 마셔야죠. 걔도 요즘 여친이랑 슬라이더 반반 맞춰놓고 산다고 매일 징징대요."
"그거 다행이네요, 둘 다."
창밖에서는 죽었던 드론 대신, 진짜 새 한 마리가 창틀에 잠깐 앉았다 날아갔다. 은재는 그 새를 눈으로 잠깐 좇다가, 다시 원고로 시선을 돌렸다. 도영은 그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데이터도 흐르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따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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