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 2

가능한 경로들

— 또는, 거미는 왜 오늘도 같은 집을 짓는가작가 주: 이 이야기를 쓰기 전에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이미 중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처럼.1부: 유전자와 두부1.두부가 싫어지기 시작한 건 스물한 살 여름이었다.정확히는, 두부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두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 싫어진 거였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삶의 많은 것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고 했다. 전쟁 때 두부 한 모를 발견하고 울었다는 얘기를 할아버지 생전에 몇 번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인지 모..

일상다반사 2026.05.31

시간 여행자의 깨달음

1부 — 빛의 방향첫 번째 감각은 냄새였다.타르와 말똥과 무언가 탄 것의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젖은 나무와 된장과 연기의 냄새가 층처럼 깔려 있었다. 이준혁은 눈을 뜨기 전에 이미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뇌피질이 정보를 처리하기 전에 편도체가 먼저 반응했다. 공포도 아니었고 놀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오래된 감각, 뭔가 심각하게 어긋났다는 원시적인 신호였다.눈을 떴다.천장이 낮았다. 회색 목재로 된 천장이었다. 그 틈으로 빛이 흘러들었는데, 그 빛은 이준혁이 평생 보아온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형광등의 차가운 흰색도 아니었고 LED의 선명한 백색도 아니었다. 황색이었다. 노랗고 두껍고, 마치 빛 자체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공기 중에 고여 있었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 물질에 가까웠다. 숨을..

일상다반사 202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