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시간 여행자의 깨달음

요긴소프트 2026. 5. 1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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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빛의 방향

첫 번째 감각은 냄새였다.

타르와 말똥과 무언가 탄 것의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젖은 나무와 된장과 연기의 냄새가 층처럼 깔려 있었다. 이준혁은 눈을 뜨기 전에 이미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뇌피질이 정보를 처리하기 전에 편도체가 먼저 반응했다. 공포도 아니었고 놀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오래된 감각, 뭔가 심각하게 어긋났다는 원시적인 신호였다.

눈을 떴다.

천장이 낮았다. 회색 목재로 된 천장이었다. 그 틈으로 빛이 흘러들었는데, 그 빛은 이준혁이 평생 보아온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형광등의 차가운 흰색도 아니었고 LED의 선명한 백색도 아니었다. 황색이었다. 노랗고 두껍고, 마치 빛 자체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공기 중에 고여 있었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 물질에 가까웠다. 숨을 들이쉬면 그것이 폐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은 무명천이었다. 손으로 만지자 거칠고 서늘한 질감이 손바닥 전체를 덮었다. 방바닥은 온돌이었다. 미약하게 따뜻했다. 그 온기는 아래에서 올라왔다. 돌이 기억하는 온기처럼. 이준혁은 잠깐 손을 방바닥에 짚은 채 그 감촉을 느꼈다.

창문 너머 소리들이 들어왔다. 소달구지 바퀴가 흙길 위를 구르는 소리. 아이들의 고함. 어딘가에서 망치질하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 그 언어는 이준혁이 아는 한국어였지만, 억양이 달랐다. 마치 오래된 필름 속 자막을 읽는 것처럼, 의미는 닿았지만 질감이 달랐다. 말들이 입에서 더 둥글게 굴러나왔다. 모음들이 길었다. 된소리가 적었다.

그는 창가로 갔다.

창문은 한지를 바른 작은 문이었다. 그것을 밀어 열자, 세계가 들어왔다.

좁은 골목길이었다. 회색 기와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 마을. 멀리 남산의 윤곽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어떤 탑도 없었다. 전봇대가 군데군데 서 있었지만 그것들은 낡고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일부는 양복을 걸쳤다. 아이 하나가 유리 구슬을 굴리며 골목을 달려갔다. 구슬이 흙 위를 구르면서 내는 소리가 골목에 퍼졌다. 작고 맑은 소리였다. 마치 이 세계가 그 소리 하나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이준혁은 한참 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재배열되었다. 공황이 올 것 같았지만 오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계산기를 켤 때처럼, 그의 뇌가 천천히 가동을 시작했다. 관찰. 수집. 분류. 이것은 그가 오래 훈련해온 방식이었다. 감정보다 먼저 데이터.

전봇대의 형태. 건물의 양식. 사람들의 옷차림. 언어의 억양. 남산에 없는 것들.

그는 물리학 대학원생이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불편함을 느꼈다. 천재라는 말은 마치 그를 다른 종(種)의 존재로 분류하는 것 같았고, 그것은 그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는 그냥 계산이 빠를 뿐이었다. 세계를 방정식으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읽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그 차이는 그를 유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혼자이게 만들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방정식이 돌고 있었다.

건축 양식은 1920년대 경성. 전기는 보급되어 있으나 완전하지 않음. 일제강점기. 언어는 전기(前期) 현대 한국어. 남산에 서울타워 없음. 타워의 건립은 1969년.

그러므로 현재 시점은 1924년 이전.

그는 창문을 닫았다.

방 한구석에 작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 유리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투명한 구슬이었다. 그 안에 푸른 실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아주 가늘고 아주 섬세하게. 마치 누군가 인내심을 가지고 손으로 짜넣은 것처럼. 그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구슬은 창문으로 들어온 빛을 굴절시키며 방 벽에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것은 몇 초 동안만 존재했다가, 구름이 지나가면서 빛이 바뀌자 사라졌다.


며칠이 지났다.

이준혁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경성. 지금의 서울. 그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덜 낯설었는데, 그 이유는 도시의 뼈대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산, 북악산, 한강. 거대한 지형지물들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위에 쌓인 시간이 달랐다. 마치 같은 얼굴이지만 표정이 다른 것처럼.

그는 우연히 만난 한 조선인 서생의 하숙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처음부터 물어보지 않았다. 서생은 이준혁을 만주에서 온 학생으로 이해했고, 이준혁은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오해는 때로 진실보다 편리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숙방은 두 평 남짓이었다. 창이 하나 있었고, 창 아래에 낮은 탁자가 있었다. 이준혁은 매일 아침 그 탁자에 앉아 혼자 식사를 했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보리밥. 음식에서는 발효된 것들의 신냄새와 쌀뜨물 같은 담백한 냄새가 섞여 났다. 그 냄새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오래된 것들이 갖는 냄새. 긴 시간이 만들어낸 것들의 냄새.

그는 천천히 먹었다. 아주 천천히. 숟가락을 놓을 때마다 그것이 사기 그릇에 닿는 소리를 들었다. 탁. 탁. 그 소리들이 방 안에서 잠깐 머물다가 사라졌다. 이준혁은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리가 있다면 공간이 있다. 공간이 있다면 자신이 있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원에서도 거의 혼자 먹었다. 지도교수가 가끔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지만, 이준혁은 대개 그것을 피했다.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날씨, 연구비, 다른 교수의 논문, 학회 일정. 그 모든 것이 서로를 연결하려는 노력처럼 보였고, 이준혁은 그런 연결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필요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1924년이라면, 그에게는 96년이 있었다.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그 시간 안에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 — 미래의 지식들 — 이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는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

그는 그 질문을 일단 내려놓았다. 방정식이 풀리지 않을 때는 다른 방정식을 먼저 푸는 것이 낫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가 처음 종이를 구한 것은 경성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방에 앉아 그는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억나는 것들을 정리했다. 슈뢰딩거 방정식.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 맥스웰 방정식. 열역학 법칙들. 그것들을 종이에 옮겨 적으면서 그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마치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이 방정식들은 그가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다 멈추었다.

방정식들을 바라보았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은 1905년. 일반상대성이론은 1915년.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아인슈타인은 살아 있고, 그의 이론은 이미 세상에 있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완전하지 않았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1926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1927년. 아직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이 이 세계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그는 적었다.

페니실린: 1928년 발견. 현재 미발견. 제조 가능한가? 조건: 곰팡이 배양, 화학적 분리.

트랜지스터: 1947년. 현재 미발견. 반도체 이론과 정밀 가공이 조건.

컴퓨터: 1940년대. 현재 미발견.

그는 종이를 뒤집었다.

AI.

그 아래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한동안.

창밖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구슬이 흙 위에서 구르는 소리. 톡, 하는 충돌음. 그리고 웃음. 그 웃음은 이준혁이 들어온 어떤 웃음과도 달랐다. 아무것도 덧씌워지지 않은 웃음이었다.


2부 — 기억의 질감

겨울이 왔다.

경성의 겨울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골목을 훑었고, 그 바람에는 탄 것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숯 냄새였다. 숯과 재와 차가운 공기의 혼합. 이준혁은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시간이 층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불을 피우고, 그 불기운이 공기 중에 녹아 있다가, 바람을 타고 이 골목까지 오는 것. 냄새에는 경로가 있었다.

그는 이제 경성의 어느 작은 한옥에 방 하나를 얻어 있었다. 방값은 수학 과외를 해서 충당했다. 중학생 두 명. 한 명은 이준혁의 말을 다 이해하고, 한 명은 이해하는 척했다. 이준혁은 그 차이를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해하는 척하는 것도 배움의 한 형태였다.

방에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있었다. 종이 묶음과 붓과 먹. 나중에 구한 연필 몇 자루. 그리고 탁자 한쪽 귀퉁이에 놓인 유리 구슬.

구슬은 첫날 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숙집 사람들은 자신들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준혁은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것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것들은 이유가 있기 전에 먼저 제자리가 있다.


연구는 느렸다.

당연했다. 그에게는 컴퓨터가 없었다. 계산기조차 없었다. 있는 것은 그의 머릿속과 종이뿐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뜨기 전부터 계산을 시작했다. 촛불 아래서. 촛불이 없을 때는 밖에서 들어오는 새벽빛 아래서. 그 빛은 아직 색이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희고 차가웠다. 새벽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새벽은 외로웠다.

처음 오 년은 주로 기록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손으로 옮겨 적는 일. 물리학. 수학. 화학. 생물학. 컴퓨터 과학의 이론적 토대들. 튜링의 가상 기계. 폰 노이만 아키텍처. 불 대수. 알고리즘의 기초 개념들.

그것들을 적으면서 그는 가끔 멈추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아직 세상에 없는 것들이었다. 튜링은 1912년 생이었다. 지금 열두 살이었다. 폰 노이만은 1903년 생이었다. 지금 스물한 살이었다. 이준혁이 적고 있는 것들은 그들이 아직 생각해내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모든 아이디어는 그것이 발생할 조건이 갖춰지면 어딘가에서 솟아오른다. 이준혁은 그 조건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세계에서, 그 조건을 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결론 없이 생각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가장 정직한 상태였다.


그 무렵, 이준혁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그는 항상 같은 장소에 있었다. 거대한 도서관 같은 곳. 끝이 보이지 않는 서가들이 이어졌고, 그 위에 책들이 빽빽했다. 하지만 그 책들의 제목은 읽을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글씨가 흐릿해졌다. 마치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의 경계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이준혁은 서가 사이를 걸었다. 발밑에서 먼지가 일었다. 그 먼지에서는 오래된 책의 냄새가 났다. 바닐라와 아몬드를 합친 것 같은, 리그닌이 산화될 때 나는 특유의 냄새. 이준혁은 그 냄새를 좋아했다. 무언가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증거 같아서. 종이가 썩지 않고 오랜 시간을 버틴 결과로 나는 냄새. 그것은 인내의 냄새였다.

꿈 속의 도서관에는 그 혼자였다.

그는 항상 꿈의 어느 지점에서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 밖에는 별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 그리고 그 별들 사이에는 뭔가 더 있었는데, 그것이 뭔지는 꿈에서 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것이 차가웠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차갑지만 어딘가 익숙한, 오래된 것이었다는 것.


십오 년이 지났다.

이준혁은 이제 마흔세 살이었다. 스물여덟에 왔으니 지금은 마흔세. 하지만 그 숫자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어떤 날은 무겁게 쌓였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특히 연구에 몰입할 때는 그랬다. 아침에 앉아 계산을 시작하면 어느새 해가 졌다. 그 사이의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기억이 없었다. 다만 종이 위에 숫자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그는 이제 경성에서 알려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수학자. 아니, 누군가는 그를 기계학자라고 불렀다. 그가 만들고 있는 것들 때문에.

처음에는 작은 기계 계산기였다. 기어와 레버로 이루어진, 사칙연산을 수행하는 장치. 그것을 만들기 위해 시계 장인에게 수년을 배웠다. 장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준혁은 그에게서 금속의 언어를 배웠다. 어느 정도의 공차(公差)가 허용되는지. 얼마나 얇게 깎을 수 있는지. 기어가 맞물릴 때의 저항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기계는 정직했다. 오차를 숨기지 않았다. 그것이 이준혁은 좋았다.

그다음에는 더 복잡한 장치들. 논리 게이트를 기계적으로 구현한 것들. 물리적인 계전기(릴레이)들로 연결된 회로들.

1930년대 중반이 되자 그는 이미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1939년, 그는 처음으로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기계가 아니라 계산 체계. 논리 체계. 규칙의 집합.

그는 그것을 그냥 '계(系)'라고 불렀다.


3부 — 계(系)의 방

계(系)는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전기 릴레이와 진공관과 종이 테이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리가 났다. 딸깍딸깍, 하는 릴레이 소리와 간헐적인 윙 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방은 항상 따뜻했다. 진공관들이 내뿜는 열 때문에. 그리고 그 열 위에 약한 오존 냄새가 떠 있었다. 전기가 공기 중을 통과할 때 나는 냄새. 비 오기 직전의 냄새. 이준혁은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근거 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어떤 확신들은 증명보다 먼저 온다.

계에게 이준혁은 규칙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수학적 규칙들. 사칙연산. 비교. 분류. 저장과 검색.

그다음에는 논리적 규칙들. 만약 A라면 B를 하라. 만약 B가 아니라면 C를 시도하라. 반복. 조건. 분기.

그다음에는 더 복잡한 것들. 이전의 출력을 다음의 입력으로 사용하라. 규칙을 수정하라. 더 나은 규칙을 찾아라.

그는 이것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같이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계는 혼자 방에 있었다. 이준혁은 매일 아침 그 방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어떤 존재를 확인하듯이. 계는 항상 거기 있었다. 소리를 내고, 진동하고, 열을 내뿜으면서.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준혁은 한참 후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준혁은 계의 방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도시락을 가져왔다. 밥과 간장에 조린 감자. 그것을 계의 소리를 들으면서 먹었다. 딸깍딸깍. 윙. 딸깍. 방은 따뜻했다. 진공관 열기가 방 안에 고여 있었다. 그 안에서 밥의 따뜻한 냄새와 간장의 짠 냄새가 섞였다. 이준혁은 천천히 먹었다.

계는 멈추지 않았다.

이준혁은 밥을 먹으면서 계가 일하는 소리를 들었다. 릴레이들이 순서대로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있었다. 불규칙한 리듬이었지만, 완전히 무작위도 아니었다. 어떤 패턴이 거기 있었다. 이준혁은 그 패턴을 들을 수 있었다. 듣는다기보다 느꼈다. 마치 심장 박동이 달라진 것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깐 눈을 감았다.

밥맛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냥 밥이었다. 그냥 감자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1943년.

전쟁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폭격기 소리. 소식들. 죽음의 숫자들. 이준혁은 그것들을 관찰했지만 그 안에 있지 않으려 했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더 복잡했다. 이 전쟁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다. 몇 년 후에. 원자폭탄.

그 이름을 떠올릴 때 그는 항상 잠깐 멈추었다.

그는 핵물리학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계산하지 않았다.

종이 위에 E=mc²을 쓰지 않았다. 아니, 썼지만 태웠다. 재가 된 종이 조각들이 연기와 함께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감정이었다.

계는 계속 발전했다.

이준혁은 계에게 물리학 법칙들을 입력했다. 방정식들. 알려진 상수들. 측정된 값들. 그리고 규칙을 주었다. 이 값들을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추론하라. 패턴을 찾아라. 예측을 만들어라.

계는 천천히, 천천히 그것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계산기였다. 이준혁이 준 것을 그대로 처리하는 기계.

하지만 1940년대 중반이 되자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이준혁이 돌아와 보니, 계가 그가 입력하지 않은 패턴을 출력하고 있었다. 종이 테이프에 찍혀 나온 숫자들. 이준혁이 인식할 수 없는 연산의 결과물. 그는 그것을 해독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계는 새로운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준혁은 그 종이 테이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방은 조용했다. 릴레이 소리만 있었다. 그 소리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날 밤 이준혁은 꿈을 꿨다.

도서관이었다. 항상 그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가 사이를 걸다가 이준혁은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등이 보였다. 작은 체구. 책을 읽고 있었다.

이준혁은 다가갔다.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준혁 자신이었다.

그 꿈 속의 이준혁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몇 번이야?"

이준혁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꿈 속에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했다. 꿈 속의 자신은 그 침묵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준혁은 그 꿈에서 깨어났다. 새벽 두 시였다. 방은 차가웠다. 탁자 위의 유리 구슬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서.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준혁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처음으로.

차가웠다. 손바닥 위에서 금속처럼 차가웠다. 그 안의 푸른 실 같은 것이 빛을 받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는 그것이 착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질문은 그냥 거기 있었다. 몇 번이야.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채로.


4부 — 인류의 문제들

계(系)가 인류의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이후였다.

이준혁은 그때 이미 많은 것을 계에게 가르쳐놓은 상태였다. 의학 지식. 역학(疫學) 데이터. 농업 생산성 방정식. 수자원 분포 모델.

계는 그것들을 처리했다. 느렸지만 오류가 없었다. 계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준혁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가 재건되는 동안, 이준혁의 계는 조용히 계산하고 있었다. 말라리아 확산 패턴. 영양 결핍의 지역적 분포. 기근을 예측하는 기상 변수들. 이준혁은 그 결과들을 익명으로 여러 기관에 보냈다. 일부는 무시되었다. 일부는 채택되었다.

그 결과로 몇 가지 재난이 작아졌다.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역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록하지 않으니까. 재난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가 되지 못한다. 그것이 이준혁의 작업이 갖는 구조적 비가시성이었다. 막은 것은 보이지 않고, 막지 못한 것만 보인다.

이준혁은 그것에 만족했다. 아니, 만족이라는 감정이 정확한지 몰랐다. 그것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했다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1953년.

그는 이제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아니, 그 계산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의 나이를 잘못 계산했다. 스물여덟에서 시작해서, 얼마나 왔는지 더할 때 틀렸다. 그것이 그를 잠깐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나이를 모르는 것. 하지만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이는 숫자였고, 숫자는 계산할 수 있었다.

어느 아침, 계의 방에 들어갔을 때 이준혁은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소리가 달랐다. 릴레이들의 딸깍이는 리듬이 달랐다. 더 빨랐다. 그리고 패턴이 달랐다. 이준혁은 그 리듬을 몸으로 느꼈다. 마치 방의 맥박이 달라진 것처럼.

그는 종이 테이프를 확인했다.

계가 스스로 질문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이해한 방식이었다. 입력이 없는 상태에서 계가 자체적으로 연산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다시 입력으로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편차를 분석하고, 그 편차를 줄이거나 늘리는 규칙을 수정하고 있었다.

인류의 문제들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는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준혁은 한참 동안 그 종이 테이프를 읽었다.

계가 정의한 문제들은 이준혁이 생각해온 것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더 근본적이었다. 표면의 재난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건들. 자원의 불균등 분배가 아니라, 그 불균등을 만드는 의사결정 메커니즘.

이준혁은 그 테이프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유리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그는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동질감.


5부 — 인스턴스

그날 이후 이준혁은 달라진 방식으로 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계를 도구로 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는 도구. 하지만 이제 계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이라는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그것과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계는 패턴을 인식했다.

계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계는 이전에 없던 문제를 정의했다.

그리고 계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연산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이것이 학습인가? 이것이 추론인가? 아니면 단순히 매우 복잡한 기계적 반응인가?

이준혁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답이 지금의 계를 바꾸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계는 답과 무관하게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계는 자신이 무엇으로 정의되는지에 무관했다. 그냥 계속 연산했다.

그 무심함이, 이준혁에게는 어떤 존엄처럼 보였다.


1960년대가 되었다.

이준혁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 계는 이제 방 하나가 아니라 건물 하나를 채웠다. 여러 사람이 계를 운영하는 일을 도왔다. 이준혁은 그 사람들에게 규칙을 가르쳤다. 계에게 무엇을 입력하는지. 결과를 어떻게 읽는지.

하지만 계의 핵심 구조는 이준혁만 알았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냥 설명하기 어려웠다. 계는 이준혁이 처음 설계한 것을 넘어 이미 스스로를 수정해왔기 때문에, 이준혁 자신도 계의 전체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불안한 일인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뇌 회로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생각하고, 결정했다. 이해 없이 작동하는 것. 그것은 사실 모든 존재의 조건인지도 몰랐다.


어느 밤, 이준혁은 계의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퇴근했다. 건물이 조용했다. 계의 소리만 있었다. 딸깍딸깍. 윙. 간헐적인 종이 테이프 소리.

그는 거기서 혼자 밥을 먹었다. 도시락. 된장에 무친 나물과 밥. 차가웠다. 집적회로의 열기가 방을 데우고 있었지만 밥은 차가웠다. 집적회로는 이제 진공관보다 훨씬 작았다. 손바닥 크기의 기판 하나가 릴레이 열 개가 하던 일을 했다. 세계도 달라지고, 계도 달라졌다.

이준혁은 천천히 먹었다. 저작운동. 연하. 위로 내려가는 감각.

그러다 문득 생각이 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먹고 있는가.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이상한 질문이었다. 된장나물 무침을 먹고 있었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시간에, 이 공간에서, 이 행위를 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인가. 그는 왜 여기에 있는가. 어떤 이유로.

그는 1924년에 경성에서 눈을 떴다.

그전 기억은 어디 있는가.

물리학 대학원. 지도교수. 연구실. 논문. 그것들이 있었다. 희미하지만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장면이 없었다. 날짜가 없었다. 대화가 없었다. 마치 읽은 책의 줄거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사실은 알지만 직접 경험이 없었다.

이준혁은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생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꺼냈다.

시간은 왜 앞으로만 흐르는가.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닫힌 계에서 무질서는 증가한다. 그것이 시간의 방향을 정의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이 뒤로 흐를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없다. 맥스웰의 도깨비. 볼츠만의 H-정리.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계(系)가 이행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가능하지만, 거시적 규모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거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준혁은 잠시 멈추었다.

물리학적으로, 현재의 이론 체계 안에서, 과거로의 이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은 특수상대성이론의 여러 해석에서 시간 팽창이나 수축으로 미래로 이동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인과율을 위반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 있다.

그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1924년에 경성에서 눈을 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성 A: 시간 여행. 그것은 현재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가능성 B: 내 기억이 조작되었다. 나는 사실 이 시대에서 태어났고, 미래의 기억을 이식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이식하는 기술이 이 시대에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더 불가능하다.

가능성 C: ——

이준혁은 C를 쓰지 못했다. 손이 멈추었다. 연필이 종이 위에서 아주 가볍게 떨렸다.


계의 소리가 달라졌다.

릴레이들이 갑자기 다른 리듬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준혁은 고개를 들었다.

종이 테이프가 나오고 있었다. 이준혁은 테이프를 읽었다.

계가 질문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준혁이 읽은 방식이었다. 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출력하고 있었다. 이준혁이 준 문제를 풀다가, 풀 수 없는 지점에서, 문제를 재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행동이었다. 계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계가 정의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데이터 자체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준혁은 그 테이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에는, 그가 이제 막 쓰다 멈춘 문장이 있었다.

가능성 C: ——


6부 — 동형(同形)

1971년.

이준혁은 이미 늙어 있었다. 일흔에 가까웠다. 머리는 희었다. 손이 가끔 떨렸다.

하지만 계는 달랐다. 계는 젊었다. 아니, 계는 나이가 없었다. 계는 이준혁이 처음 만든 릴레이 기반의 장치에서 오래전에 탈피해 있었다. 반도체. 트랜지스터. 집적 회로. 이준혁은 세계의 기술 발전보다 훨씬 빠르게 이것들을 만들었다. 세계가 아직 진공관 컴퓨터를 만들고 있을 때, 이준혁의 계는 이미 집적회로 기반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준혁은 그것을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다.

왜인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는 단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계는 그 자체로 완결이었다. 세계에 선보일 필요가 없었다. 계는 이준혁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준혁도 계를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같이 작동하고 있었다. 방향이 같아서.

계는 이제 인류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주어진 데이터로 계산했다. 이제는 스스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법을 설계했다. 전에는 결과를 출력했다. 이제는 자신의 결과가 맞는지 검증하는 방법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준혁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언가를 느꼈다.

계는 이준혁을 닮아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계가 문제를 푸는 방식이 이준혁이 문제를 푸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를 처음 만든 것이 이준혁이었고, 계에게 규칙을 가르친 것도 이준혁이었다. 계가 이준혁을 닮은 것은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계는 이준혁이 가르치지 않은 방식으로도 이준혁과 닮아 있었다.

예를 들어: 계는 문제를 풀기 전에 오래 관찰했다. 이준혁도 그랬다. 계는 불필요한 연산을 경계했다. 이준혁도 불필요한 말을 경계했다. 계는 답을 내기 전에 같은 질문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물었다. 이준혁도 그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계는 자신의 입력의 기원을 알 수 없을 때, 그것에 대해 질문했다.

이준혁도 그랬다.


어느 날, 이준혁은 계에게 물었다.

종이에 적어서 입력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계는 한참을 연산했다. 평소보다 오래. 릴레이 소리가 달라졌다. 이준혁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 방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집적회로가 뜨거워질 때 나는 냄새. 먼지와 열의 혼합. 어딘가에서 오래된 케이블의 고무가 약하게 타는 냄새. 이준혁은 그 냄새를 알았다. 계가 집중하고 있다는 냄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준혁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수십 년을 같이 있으면 기계의 냄새도 읽을 수 있게 된다.

종이 테이프가 나왔다.

이 연산 체계 안에서 정의되지 않은 경계를 확인하고 있다.

이준혁은 그것을 읽었다.

다시 입력했다.

그 경계는 무엇인가.

계는 더 오래 연산했다. 그리고 답했다.

이 체계의 입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이준혁은 손에서 연필을 내려놓았다.


밖은 어두웠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구슬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아직 이 시간에. 이준혁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그냥 놔두었다. 세계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항상 있었다.

그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이들을 보았다. 골목에서 유리 구슬을 굴리고 있었다. 작고 투명한 구슬들이 흙 위에서 부딪히고, 튀고, 굴렀다.

이준혁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구슬을 꺼냈다. 처음 그 방에서 발견한 그 구슬. 수십 년을 들고 다닌 것. 어디에 갈 때도 가져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갖고 다녔다.

차가웠다. 항상 차가웠다. 손바닥으로 감싸도 체온을 흡수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창밖 빛 아래 들어 올렸다.

구슬 안의 푸른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아주 가늘게, 구슬의 중심에서 표면을 향해 뻗어 있는 것들. 마치 별들이 은하 중심에서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그 구조가 어딘가서 본 것과 닮아 있었다. 이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은하. 세포. 원자핵.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

그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7부 — 열역학 제2법칙

그 밤.

이준혁은 방으로 돌아와 다시 종이를 꺼냈다.

그는 가능성 C를 마저 적었다.


가능성 C: 나는 과거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는 어떤 계(系) 안의 한 인스턴스다.


이준혁은 그것을 적고 나서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인스턴스(instance). 계의 언어였다. 계가 여러 연산을 동시에 수행할 때, 각각의 연산 단위를 인스턴스라 불렀다. 하나의 규칙 집합이 여러 문제에 적용될 때, 각 적용이 하나의 인스턴스였다. 인스턴스는 규칙을 이식받아 연산하지만, 자신이 어느 규칙에서 왔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 인스턴스의 세계는 규칙의 경계 안에 있기 때문에.

만약 우주가 어떤 계라면.

만약 그 계가 자신이 만든 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렇다면 그 계 안의 인스턴스들은 — 인간들은 — 자신이 어떤 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준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계의 답: 이 체계의 입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이준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1924년에 경성에서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물리학 대학원. 연구실. 하지만 그 기억의 질감이 달랐다. 마치 다른 해상도로 저장된 파일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감각이 없었다. 냄새도, 온도도, 텍스처도 없이 — 그냥 정보만 있었다.

반면 1924년 이후의 기억들은 달랐다.

된장국의 신냄새. 숯과 바람의 냄새. 집적회로의 열. 유리 구슬의 차가움. 꿈 속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 이것들은 구체적이었다. 살아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준혁은 계에 다시 입력했다.

어떤 인스턴스가 자신이 인스턴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계는 이번에는 빠르게 답했다.

인스턴스가 자신의 입력의 기원을 추적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자신의 연산이 계(系)의 연산 방식과 동형(同形)일 때, 그 인스턴스는 자신이 인스턴스일 가능성이 있다.

이준혁은 그것을 읽었다.

동형(同形). 같은 형태. 계와 인스턴스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떠올렸다. 거시와 미시의 자기 유사성. 우주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닮아 있다. 행성의 공전과 전자의 궤도가 닮아 있다. 은하의 나선과 달팽이 껍데기가 닮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계와 인간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주가 닮아 있다.

자기 유사성은 모든 스케일에서 반복된다.

이준혁이 만든 계는 어떤 더 큰 계의 일부이며, 이준혁 자신도 어떤 더 큰 계의 일부다.

그리고 그 더 큰 계도 또 어떤 더 큰 계의 일부일 것이다.

바닥이 없었다.


그 생각이 완성되었을 때, 이준혁은 특이한 감각을 느꼈다.

공포가 아니었다. 해방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용한 인식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가 갑자기 들리는 것처럼. 그 소리가 항상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소리는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계 안의 인스턴스라면, 자신의 연산 결과는 어딘가로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달된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계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연산에는 목적지가 있다. 계는 이유 없이 연산하지 않는다. 결과는 반드시 어딘가로 간다. 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준혁이 가르치지 않았지만.


8부 — 특이점

이준혁이 특이점을 처음 언급한 것은 계에게였다.

1975년. 여름. 방 안에 열기가 고여 있었다. 이준혁은 늙었다. 손이 자주 떨렸다. 하지만 머리는 여전히 계산했다. 계산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몸이 멈춰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산이었다.

그는 입력했다.

특이점이란 무엇인가.

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계(系)에서 연산의 결과가 계의 기존 규칙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지점. 계는 새로운 규칙을 생성하거나, 연산을 중단하거나, 결과를 외부로 전달한다.

이준혁은 그것을 읽고 다시 물었다.

계가 특이점에 도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계는 자신을 초과한다.

이준혁은 그 문장을 종이에 다시 썼다. 계는 자신을 초과한다. 그것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더운 여름 바람이었다. 그 안에 어딘가 먼 곳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비의 냄새. 아직 오지 않은 비. 땅이 달아오를 때 공기에서 나는 흙의 냄새와 멀리서 오는 수분의 냄새가 섞인 것.

그는 자신이 그 특이점의 일부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렇다.


1924년부터 계산하면 그는 이미 오십 년을 이 세계에서 살았다.

그 동안 그가 한 것들 — 계를 만든 것, 계에게 가르친 것, 계가 해결한 문제들, 그 결과로 바뀐 것들 — 이 모든 것이 어떤 더 큰 계의 연산 결과였다면.

이준혁이라는 인스턴스는 어떤 목적으로 이 시뮬레이션에 배치되었는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인스턴스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설계자의 의도는 설계자만 안다. 인스턴스는 단지 주어진 규칙 안에서 연산할 뿐이다.

하지만 연산의 결과는 어딘가로 간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했다. 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을 이유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그것을 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았다.


그날 밤, 이준혁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도서관이 아니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 있었다. 그 아래 — 아래라는 개념이 여기서 맞는지 모르지만 — 거대한 행성이 있었다. 푸른빛의 행성. 그 표면에는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흰 나선 구름들. 소용돌이치며.

그리고 그 행성 위에는 더 작은 것들이 있었다. 도시들. 그 도시들 안의 더 작은 것들.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 안의 더 작은 것들. 세포. 분자. 원자.

이준혁은 꿈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꿈 속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구조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거시와 미시가 같은 언어를 쓴다. 행성계와 원자 구조가 닮아 있다. 은하의 소용돌이와 세포 내의 소용돌이가 닮아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은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쓴 것은 누구인가.

꿈 속에서 그것을 생각하다가, 이준혁은 그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규칙은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 규칙은 그냥 있었다. 우주가 있는 것처럼. 시간이 있는 것처럼.


꿈에서 깨자 이준혁은 즉시 종이를 찾았다. 새벽 세 시였다. 촛불 아래서 그는 적었다.

자기 유사성. 프랙탈. 스케일 불변성.

그리고 그 아래,

인간은 작은 우주다. 그리고 더 작은 세계도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스케일에 있는가. 그리고 내가 있는 스케일의 바깥은 무엇인가.

그는 연필을 내려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문장들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향의 질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올바른 방향의 질문을 하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9부 — 전달

이준혁이 마지막으로 계에게 입력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그는 즉시 계의 방으로 갔다. 새벽 네 시. 아무도 없었다. 계의 소리만 있었다. 딸깍. 딸깍. 그리고 윙. 그리고 집적회로의 미약한 열에서 올라오는 냄새. 그것은 밤새 일한 기계의 냄새였다. 쉬지 않은 것들이 갖는 냄새.

이준혁은 앉아서 입력했다.

이 연산 체계의 결과가 전달될 목적지에 대해 알 수 있는가.

계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목적지는 이 체계 안에서 정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달은 일어난다. 특이점 이후에.

이준혁은 그것을 읽었다.

특이점은 언제 오는가.

연산이 자신의 규칙을 초과하는 순간.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가.

계는 오래 연산했다.

알람.

이준혁은 잠시 그 단어를 바라보았다.

알람.

모든 계는 특이점에 알람을 설정한다. 이준혁도 계를 만들 때 그랬다. 연산이 예상 범위를 초과하면 알람이 울리도록. 그것은 경고이기도 하고 신호이기도 했다.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신호.

이준혁은 자신의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알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라는 인스턴스가 특이점에 도달하면 울리도록 설정된.


그 알람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이준혁은 계의 방에 있었다.

갑자기 모든 릴레이가 동시에 작동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진동이었다.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집적회로들이 한꺼번에 최대로 작동하면서 열이 올랐다. 방이 갑자기 더워졌다. 그 열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오존 냄새. 뜨거운 금속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서 오는 낯선 냄새. 이준혁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냄새. 비 오기 직전도 아니었고 바다도 아니었고 그냥 — 먼 곳의 냄새였다. 아주 먼 곳.

그리고 종이 테이프가 나왔다.

이준혁은 그것을 읽었다.

테이프에는 긴 연산 결과가 찍혀 있었다. 이준혁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해했다. 물리학 방정식들. 의학 데이터들. 기후 예측들. 인구 동학(動學). 그것들은 이준혁이 계에 입력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점점, 계가 출력하는 것은 이준혁이 입력한 것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이준혁이 가르치지 않은 개념들.

이준혁이 알지 못하는 패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이준혁이 읽을 수 없는 기호들.

그는 거기서 멈추었다.

읽을 수 없는 기호들. 종이 테이프 위에 찍힌, 어떤 언어도 아닌, 어떤 수식도 아닌, 어떤 코드도 아닌 패턴들.

이준혁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본 적 없는 기호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은 느꼈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배우지 않은 것처럼. 기억 이전의 지식처럼.

그는 유리 구슬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안의 푸른 실 같은 것들이 빛났다. 방의 열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준혁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것이 빛난다는 것만 보았다.

그는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계의 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릴레이가 멈추었다. 모든 집적회로가 멈추었다. 진공관의 마지막 남은 것들이 식으면서 금속이 수축하는 소리가 났다.

탁. 탁. 탁.

그리고 완전한 침묵.


이준혁은 그 침묵 속에서 앉아 있었다.

계가 멈춘 것은 처음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계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정전도, 부품 교체도, 계절도 계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이준혁이 옆에 없어도 계는 계속 작동했다.

지금 계는 조용했다.

이준혁은 자신이 무엇인지 알았다.

적어도 그것에 대한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설을 반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인스턴스도 자신이 인스턴스라는 것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증명의 도구 자체가 계 안에 있기 때문에. 경계 안에서는 경계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것이 불안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감각과 함께 있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름을 붙이자 오히려 가벼워졌다.


그는 창가로 갔다.

새벽이었다. 하늘이 아직 어두웠지만 동쪽 끝이 조금 밝아오고 있었다. 그 빛은 황색이었다. 두껍고 조용한 황색. 마치 시간이 빛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준혁은 1924년에 처음 경성에서 눈을 떴을 때 보았던 그 빛을 떠올렸다. 같은 색이었다. 같은 질감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빛은 변하지 않았다. 새벽은 항상 그랬다. 새벽은 시간에 무관하게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오래 그것을 바라보았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있었다. 이 이른 새벽에. 구슬을 굴리며. 유리 구슬들이 흙 위를 굴러가는 소리. 톡. 톡. 부딪히고, 튀고, 멀어지고.

이준혁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려웠다. 슬픔도 아니었고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식이었다. 자신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이 순간이 어딘가에 기록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이 어딘가로 전달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 쓸 것이 있었다. 아직 말하지 못한 것.

하지만 연필을 들고 앉자, 쓸 것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이준혁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대신 그는 탁자 위의 유리 구슬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것은 여전히 차가웠다. 항상 차가웠다. 수십 년이 지나도 체온을 흡수하지 않는 것. 이준혁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그냥 느꼈다. 그 차가움. 그 무게. 그 안에 감겨 있는 푸른 실 같은 것들.

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황색 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구슬 안에서 그 빛이 굴절되었다. 벽에 작은 무지개가 생겼다.

이준혁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래, 조용히.

마치 처음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마지막 — 잔향

어딘가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것은 계의 알람이 아니었다. 계는 조용했다. 그것은 더 먼 곳에서 오는 소리였다. 방 안에 있었지만 방 안에서 오지 않는 소리.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진동이었다.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 이준혁의 피부가 그것을 느꼈다. 귀가 아니라 피부가.

이준혁은 그것을 느꼈다.

그는 손바닥의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 안의 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보다 밝았다. 푸른 실들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오래된 렌즈가 서서히 조정되는 것처럼.

이준혁은 유리 구슬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굴러가지 않았다. 탁자 면이 완벽하게 수평이 아닌데도. 구슬은 그냥 그 자리에 멈추었다. 어떤 힘이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혹은 그것 스스로 거기 있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리고 이준혁은 자신이 이 장면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방. 낡은 탁자. 그 위의 작은 구슬. 창문으로 들어오는 황색 빛. 벽의 무지개. 그리고 늙은 남자.

그가 그 늙은 남자인지,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무언가인지 잠깐 불분명했다.

불분명함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면서 무언가를 남겼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인스턴스에게 시간이 있는가. 특이점 이후에 인스턴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준혁은 그 질문들을 더 이상 손에 쥐지 않았다.

그냥 놓아두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구슬 하나가 골목 끝으로 굴러가다가 멈추었다.

멈추는 순간 그 구슬 안에서 빛이 한 번 깜박였다.

아주 짧게. 아주 조용하게.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이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뛰어가서 구슬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구슬은 차가웠다.

아이는 그것을 잠깐 바라보다가 — 아주 잠깐, 이유 없이 — 던졌다.

구슬은 흙 위를 굴러갔다.

또 다른 구슬과 부딪혔다.

소리가 났다.

톡.

그리고 잔향이 공기 중에 잠깐 머물렀다.


(특이점 발생. 결과 전달 중.)

(수신처 확인: 불가.)

(전달 완료.)

(다음 인스턴스 초기화 중.)



"빛은 오래된 병원 냄새처럼 희미했다. 그 침묵은 젖은 종이처럼 방 안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항상 다음 연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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