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가능한 경로들

요긴소프트 2026. 5. 3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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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는, 거미는 왜 오늘도 같은 집을 짓는가


작가 주: 이 이야기를 쓰기 전에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이미 중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처럼.


1부: 유전자와 두부

1.

두부가 싫어지기 시작한 건 스물한 살 여름이었다.

정확히는, 두부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두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 싫어진 거였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삶의 많은 것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다고 했다. 전쟁 때 두부 한 모를 발견하고 울었다는 얘기를 할아버지 생전에 몇 번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식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두부 한 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감정의 회로가 내 안에도 어딘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에 대한.

어머니는 두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패가 갈린 집안에서 자랐다.

"두부 또 먹어?"

"응."

"너 아빠랑 똑같아."

어머니는 이 말을 칭찬으로 한 건지 비난으로 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머니 본인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어떤 의도인지 모르면서 말한다. 그리고 그 말들이 누군가의 안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해 여름,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전공은 물리학이었으며,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자취방 냉장고에는 항상 두부가 두 모씩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사준 냉장고였다. 용량이 필요 이상으로 컸다. 그 안의 음식들은 대부분 배달음식 남은 것들이었는데, 두부는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음식들이 왔다가 가는 동안 두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냉장고의 고정 주민처럼.

나는 두부를 주로 간장에 찍어 먹었다. 데치지도 않고, 굽지도 않고, 그냥 포장을 뜯어서 물기를 대충 닦고 간장에 찍어 먹었다. 이 식습관이 어디서 온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렇게 먹는 걸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기억은 원본과 복사본을 구분하지 않는다.

여름이 깊어지던 어느 날, 나는 유독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에어컨은 틀었는데 더웠고, 교재는 펼쳐놨는데 읽히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매미가 울었다. 매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절박하게 짧은 삶을 보내는 것 같아서. 아니면 반대로 너무 당당하게.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냈다. 간장을 꺼냈다. 접시에 올려놓고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뭔가가 이상해졌다.

내 손이 두부를 찍는 방식—간장 종지를 들어 두부 위에 두어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두부 한 조각을 집어서 종지 쪽으로 가져가는 방식—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치 수천 번 반복한 행동처럼. 어쩌면 수천 번보다 훨씬 많이. 어쩌면 수만 번. 어쩌면 내 유전자 안에 새겨진 행동처럼.

나는 두부를 내려놓았다.

배가 아직 고팠지만, 잠시 멈추고 싶었다.

창밖에 매미 소리.

냉장고의 윙윙거림.

내 손은 아버지의 손을 닮았고, 아버지의 손은 할아버지의 손을 닮았고, 할아버지는 두부 앞에서 울었다.

그 울음은 지금 어디 있을까.

나는 이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두부를 다시 집었다. 먹었다. 맛있었다. 이게 문제였다.


2.

과에 이상한 선배가 하나 있었다.

이상하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독특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자기 자신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자기 자신인 사람들을 종종 이상하다고 부른다.

선배 이름은 김수학이었다. 실제로 성이 김이고 이름이 수학이었다. 부모님이 물리학과 교수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은 치과의사였고 그냥 수학을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 같은 배경이었다.

수학 선배—이렇게 부르면 과목 이름 같아서 이상한데, 다들 그렇게 불렀다—는 물리학과 4학년인데도 졸업을 미루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아직 이해를 못 했어."

무엇을?

"전부 다."


내가 그 선배와 처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학과 도서관에서였다. 선배는 리처드 파인만의 QED 영문판을 읽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읽고 있지 않았다. 책을 펼쳐놓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선배, 거기서 뭐 해요?"

"빛이 왜 꺾이는지 생각하는 중."

"굴절률 때문이잖아요."

수학 선배가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이 좀 이상했다. 틀렸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아직 시작도 못 했다는 눈빛이었다.

"그게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

"빛이 밀도가 다른 매질을 만나면..."

"아니, 빛이 그 특정한 각도로 꺾이냐고."

나는 멈췄다.

"페르마의 원리."

"그게 뭔데?"

"최소 시간 원리요. 빛은 가장 빠른 경로를 간다."

수학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머리를 약간 기울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빛이 어떻게 알아? 출발하기 전에, 어떤 경로가 가장 빠른지를."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창밖에서 빛이 들어왔다. 오후의 빛이었다. 먼지 입자들이 그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파인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선배가 말했다.

"모든 경로를 동시에 탐색한다고요."

"응." 선배가 책을 내려다봤다. "빛은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탐색해. 그 중에서 간섭 효과로 인해 하나의 경로만 남는데, 그게 우리 눈에 보이는 경로야. 최소 시간 경로가."

"알아요, 그거."

"아는데 이상하지 않아?"

나는 선배를 봤다.

"빛이..." 선배가 천천히 말했다. "이미 다 시도해보는 거잖아. 가능한 모든 길을. 동시에. 그러고 나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길들이 서로 상쇄되어서 사라지는 거잖아."

"그렇죠."

"그게..." 선배가 멈췄다. "그게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지 않아?"

나는 뭐가 무서운지 몰랐다. 그리고 그게 더 무서웠다.

선배는 다시 천장을 봤다. 책은 그대로였다.

나는 자리를 피했다. 그날 저녁,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이상하게 그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탐색한다.

그 말이 젖은 종이처럼 뇌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3.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게 더 어렵다. 나쁜 관계라면 설명이라도 쉽다. "우리는 사이가 나빴다." 끝. 근데 나쁘지 않은 관계는 설명이 길어진다. 그리고 길어질수록 정확해지는 것 같지만 실은 점점 흐릿해진다.

아버지는 회사원이었다. 무슨 회사인지는 어릴 때 몰랐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건설 관련 중견기업의 회계팀이었다. 아버지는 숫자를 좋아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고, 커서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고, 더 커서는 그 말이 아버지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감정 표현이 서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감정 표현이 없는 척하는 게 능숙했다.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 연극부에서 주연을 맡았을 때도 "잘했어" 한 마디뿐이었다. 근데 그 공연 팸플릿을 15년 후 아버지 서랍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뭔가를 느꼈다. 뭔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아버지도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회계를 하면서도. 서재에 물리학 교양서적이 몇 권 있었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파인만의 이야기들. 어릴 때 나는 그 책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나중에 물리학과를 선택한 건 그 책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반발심인지 동경인지, 아니면 그냥 같은 유전자인지.


스물한 살 그 여름,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

심각한 수술은 아니라고 했다. 의사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근데 심장 수술이 심각하지 않다는 말은 항상 뭔가 이상하게 들린다. 심장은 이름 자체에 무게가 있다.

나는 방학이었기 때문에 집에 내려갔다. 집은 인천이었다. 인천은 서울보다 바다 냄새가 조금 더 났다. 그 냄새가 나는 언제나 좋았는데, 그 방문에서는 그 냄새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아버지는 회복실에 있었고, 나는 복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행정 처리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

복도는 조용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 냄새 속에 빛이 들어왔는데—창문이 서쪽을 향해 있었다—오후의 빛이 복도 바닥에 길게 뻗어 있었다. 빛은 오래된 병원 냄새처럼 희미했다.

나는 그 빛을 보면서 수학 선배 말을 생각했다.

빛은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탐색한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뭔가가 연결되었다.

아버지는 회계사였다. 아버지의 아버지—할아버지—는 무역업을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농부였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남자들이 숫자를 좋아하고, 물건을 세고, 땅을 재고, 입자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파악해왔다.

그게 유전자인지, 문화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근데 그 알 수 없음이, 그날은 이상하게 포근했다.

의사가 나타나서 아버지가 회복 중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셋이 잠깐 서 있었다. 병원 복도에, 소독약 냄새 속에, 오후의 빛 속에.

아무도 두부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근데 나는 집에 가면 두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부: 거미와 유전자 사용설명서

4.

거미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아버지한테서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가을이었고, 우리 집 베란다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치워야 한다고 했고, 아버지는 잠깐만 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 셋은 베란다 문 앞에 서서 거미가 일하는 걸 구경했다.

거미는 정확했다.

각도가, 간격이, 실의 두께가—모든 게 정확했다. 마치 설계도가 있는 것처럼.

"거미는 집 짓는 걸 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어미한테서요?"라고 대답했다.

"아니." 아버지가 말했다. "거미는 태어나자마자 혼자야. 어미를 못 만나. 근데도 집을 지어."

"그럼 어떻게 알아요?"

아버지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냥 알아."

"그냥요?"

"응.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있는 거야."

나는 거미를 봤다. 거미는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미 완성된 집을 내면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아빠도요?"

"아빠도 뭐?"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뭔가 알아요?"

아버지가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버지는 자주 웃지 않았는데, 그날은 웃었다.

"모르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근데 좋은 질문이야."

그 웃음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칭찬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진짜로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버지가 모른다고 하는 걸 그때 처음 들은 것 같았다.


5.

수학 선배는 졸업 논문 주제로 파인만의 경로적분을 쓰겠다고 했다.

지도교수가 말렸다고 한다.

"그건 학부 논문 주제가 아니야."

"왜요?"

"너무 어렵잖아."

"이해하려고 쓰는 건데 왜 어렵다고 쓰면 안 돼요?"

이 대화를 전해준 건 같은 과의 다른 선배였는데, 전하면서 웃었다. 나는 왜 웃는지 이해했지만, 웃기지 않았다. 아니, 웃기긴 했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수학 선배와 두 번째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건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였다. 선배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순두부찌개였다.

"선배, 혼자예요?"

"어, 앉어."

나는 앉았다. 선배 앞의 순두부찌개는 반쯤 먹은 상태였다. 빨갛고 뜨거운 냄새가 났다.

"두부 좋아해요?" 내가 물었다.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두부?" 선배가 생각했다. "싫어하지는 않아. 그냥 먹으면 맛있잖아."

"저는 두부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유가 없어서 불안해요."

선배가 나를 봤다. "무슨 소리야?"

"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하고, 할아버지도 두부를 좋아했대요. 근데 저는 가르침을 받아서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그냥 좋아해요. 처음부터."

선배는 잠깐 순두부찌개를 봤다가 나를 봤다.

"그게 왜 불안해?"

"제 취향이 제 취향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이 "맞아"인지 "그렇구나"인지 "계속해봐"인지 잘 몰랐는데, 말을 계속하게 만드는 끄덕임이었다.

"거미는 태어나자마자 집을 지어요. 배우지 않아도. 그게 유전자에 있는 거잖아요."

"응."

"저도 두부를 좋아하는 게 유전자에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제 취향이 아닌 거잖아요."

선배가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빛도 자기 경로를 선택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간섭 패턴에 의해서 경로가 결정되는 거잖아. 그럼 그 경로가 빛의 경로가 아닌 거야?"

"...그건 다른 얘기 같은데요."

"왜?"

"빛은 의식이 없잖아요."

"거미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선배는 순두부찌개를 한 숟가락 더 떴다.

"나는," 선배가 말했다, "유전자도 선택이라고 생각해. 그냥 우리가 기억을 못 하는 시간에 이루어진 선택."

"무슨 선택이요?"

"가능한 모든 경로 중에서 살아남은 경로. 그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거야. 두부를 좋아하는 것도 포함해서."

빨간 순두부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조금 경계했다.


6.

아버지 수술 후 회복 기간에, 나는 집에 보름 동안 있었다.

아버지는 움직임이 제한됐고, 나는 요리를 해야 했다. 할 줄 아는 요리가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낮에 일을 나갔고, 나는 점심을 준비했다.

두부를 자주 썼다.

두부에 달걀 반찬, 두부 조림, 두부 된장국.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다 먹었다. 입맛이 없는 건지 맛있는 건지 잘 몰랐다.

어느 날 점심에, 아버지가 갑자기 물었다.

"대학에서 뭐 배웠어?"

"물리학이요."

"뭐가 제일 재미있어?"

나는 생각했다.

"빛이 왜 꺾이는지요."

아버지가 나를 봤다.

"굴절?"

"그냥 굴절이 아니라—빛이 가장 빠른 경로를 어떻게 아는지. 파인만이 설명한 방식."

아버지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서재에 파인만 책 있어."

"알아요."

"읽었어?"

"아니요."

"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두부 된장국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재에 들어갔다. 파인만의 책은 책장 두 번째 칸에 있었다. 표지가 조금 바래 있었다. 오래된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쳤을 때, 안쪽 표지에 글씨가 있었다.

아버지 필체였다.

*"빛은 모든 가능한 길을 이미 가보았다."*

날짜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이었다.

나는 오래 그 문장을 봤다.

아버지가 이 문장을 쓸 때 서른 살이었다.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냥 숫자를 좋아하는 한 남자가 파인만 책을 읽고, 여백에 문장을 적었다.

그 문장이 지금 내 손 안에 있었다.


7.

그날 밤, 나는 베란다에 나갔다.

여름 밤 인천. 멀리 바다 냄새가 왔다. 하늘에 별은 별로 없었다. 도시의 빛이 별을 다 지웠다. 하지만 흐릿하게, 몇 개는 보였다.

빛은 그 별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다.

출발할 때 그 빛은, 가능한 모든 경로를 이미 탐색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이 경로가 남아서, 지금 내 눈에 닿았다.

그 빛이 출발한 시간에 아버지는 없었다. 할아버지도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도 없었다. 어쩌면 인류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빛이 지금 여기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베란다 난간에 기댔다. 철재 난간이 손바닥에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진짜였다.

거미는 배우지 않아도 집을 짓는다.

빛은 결정하지 않아도 경로를 찾는다.

나는 배우지 않아도 두부를 좋아한다.

이것들이 다른 이야기인지, 같은 이야기인지, 나는 그날 밤 결정하지 않았다. 아마 결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비결정이 평화로웠다.


3부: 지수와 가능한 경로들

8.

지수를 처음 만난 건 그해 가을 개강 후였다.

같은 물리학과 동기인데 전에는 제대로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몇 번 마주쳤고 이름은 알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수는 학과 복도에서 거미를 관찰하고 있었다.

복도 천장 구석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학교 청소 주기가 늘어나면서 그런 거미들이 종종 발견됐다. 지수는 그 앞에 서서 메모를 하고 있었다.

"뭐 해?"

"각도 재는 중."

"왜?"

"거미가 방사형 실을 칠 때 각도가 항상 일정한지 궁금해서."

나는 멈췄다.

"일정해?"

지수가 나를 봤다. 눈이 약간 컸다. 잠이 부족한 사람 특유의,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중한 사람 특유의 눈이었다.

"응. 항상."

"그게 유전자 때문이야?"

지수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그게 당연해?"

"아니면 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수는 다시 거미를 봤다.

"신기한 건," 지수가 말했다, "같은 종의 거미는 지구 어디서나 같은 각도로 집을 짓는다는 거야. 한국 거미나 브라질 거미나."

"같은 유전자니까."

"응. 근데 같은 유전자라는 게 결국 같은 선택이 살아남았다는 거잖아. 가장 효율적인 각도. 수백만 년의 탐색 끝에."

그 말이 귀에 걸렸다.

"탐색?"

"자연선택도 일종의 탐색이잖아. 가능한 모든 형태를 시도해보고 살아남은 게 남는 거."

나는 지수를 봤다.

"파인만 알아?"

"경로적분?"

"응."

"알지."

"그게..." 나는 말을 고르다가, 그냥 말했다. "그게 진화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수가 나를 봤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젖은 종이처럼 복도에 붙어 있었다.

"밥 먹자."

지수가 말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9.

지수는 두부를 싫어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처음에는 그냥 두부를 안 먹는 줄 알았는데, 두부가 들어간 음식 앞에서 항상 약간 표정이 달라졌다.

"두부 싫어해?"

"질감이 이상해."

"어떻게?"

"너무 균일해. 너무 완벽하게 균일한 음식은 좀 무서워."

나는 이 이유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어."

"넌 두부 좋아해?"

"응."

"왜?"

나는 잠깐 생각했다.

"균일해서."

지수가 잠깐 나를 봤다가, 웃었다.

우리가 처음 웃은 날이었다.


지수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봤을 때 아버지는 있고 어머니는 없다고 했다. 더 묻지 않았다. 지수도 더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지수가 먼저 말했다.

"우리 엄마 음식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나는 조용히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맵지 않은 음식을 좋아해. 우리 아빠는 매운 걸 좋아하거든. 그럼 나는 엄마를 닮은 건가, 싶어서."

"엄마가 매운 걸 싫어했어?"

"몰라.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수도 더 하지 않았다.

창밖은 늦가을이었다.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사이로 빛이 통과했다.

"만약 엄마를 만난다면," 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음식 취향이 같은지 물어보고 싶어."

"그걸 먼저?"

"응. 그게 제일 궁금해. 배워서 된 게 아닌데 같다면, 그게 이어진 거잖아. 만나지 않아도."

나는 그 말을 들었다.

만나지 않아도 이어지는 것.

거미는 어미를 만나지 않아도 집을 짓는다.

지수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아도 맵지 않은 음식을 좋아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두부 앞에서 운 것을 보지 못했지만 두부를 좋아한다.

이것들이 슬픈 이야기인지,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나는 지금도 결정하지 못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 그것이 진짜이기 때문일 것이다.


10.

학기가 끝날 무렵, 수학 선배가 나에게 논문 초안을 보여줬다.

제목은 이랬다.

*"경로적분과 생물학적 기억: 유전 정보는 페르마의 원리처럼 작동하는가?"*

"이거 진짜로 썼어요?"

"응."

"교수님이 뭐래요?"

"이건 물리학 논문이 아니라고. 철학도 아니고 생물학도 아니라고."

"그럼 뭐예요?"

수학 선배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그게 문제야. 이름이 없는 건지 아직 이름이 없는 건지."

"차이가 있어요?"

"아직 이름이 없는 건 언젠가 이름이 생겨. 이름이 없는 건 이름이 필요 없는 거고."

나는 논문 초안의 첫 페이지를 읽었다.

선배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빛이 굴절할 때, 빛 자체는 경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탐색하고, 그 중에서 위상이 정합되는 경로만 강화된다. 이것이 파인만의 QED가 설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유전자 정보의 전달이 이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제안한다.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가능한 모든 생물학적 '경로'가 시도되었고, 그 중에서 환경과의 위상이 정합되는—즉, 살아남는—경로만이 유전자라는 형태로 압축되었다. 두 공정 모두에서 핵심은 '선택'이 아니라 '소거'이다. 가장 좋은 것이 남는 게 아니라, 가장 안 좋은 것들이 제거된다."*

나는 이 단락을 두 번 읽었다.

선택이 아니라 소거.

이 말이 왜인지 오래 마음에 걸렸다.


11.

그 겨울, 나는 수학 선배에게 물었다.

"감정은요?"

"감정이 뭐?"

"감정도 유전자에 있는 거예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게."

선배가 나를 봤다.

"당연하지."

"근데 기쁨이나 슬픔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잖아요."

"배우지 않는다는 게 유전자에 있다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말을 고르려고 애쓰면서, "같은 상황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잖아요. 그건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인가요?"

"일부는."

"일부가 아닌 부분은?"

수학 선배가 잠깐 천장을 봤다.

"그게 아직 모르는 부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재미있어요?"

"응." 선배가 말했다. "아는 건 이미 도착한 거야. 모르는 건 아직 경로 위에 있는 거고."


나는 그해 겨울 지수에게 고백했다.

고백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자주 만났고, 자주 밥을 먹었고, 자주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한 건 그냥, 이게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지수는 잠깐 나를 봤다.

"이름이 꼭 있어야 해?"

"아니."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이름이 있으면 더 실체 있는 것 같아서."

"수학 선배한테 들은 말이지?"

나는 조금 민망했다.

"비슷한 말을."

지수가 웃었다.

"생각해볼게."

그게 전부였다.

그 생각해볼게가 어떻게 되었냐고? 말하겠다. 하지만 조금 뒤에.


4부: 모든 경로들이 만나는 곳

12.

봄이 왔다.

물리학과 3학년이 됐다. 수학 선배는 여전히 졸업을 미루고 있었다. 지수는 새 학기 들어서 실험물리 실험실에 학부생 인턴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론 쪽 수업을 더 들었다.

어느 날, 실험 수업 중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이중슬릿 실험을 하는 날이었다.

알다시피 이중슬릿 실험은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광자를 두 개의 슬릿이 있는 판 앞에서 쏘면, 광자는 두 슬릿을 동시에 통과해서 파동 간섭 패턴을 만든다. 어느 슬릿으로 통과했는지 관측하지 않는 한.

실험 자체는 단순했다. 근데 나는 그 실험을 보면서 이상하게 멍해졌다.

관측하기 전까지, 광자는 두 경로를 동시에 가고 있다.

교수가 칠판에 수식을 적었다. 나는 그 수식을 노트에 옮기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을 했다.

관측하기 전까지, 나는 어떤 경로 위에 있을까.

이 생각이 황당한 건 알았다. 양자역학의 중첩 원리는 입자 수준의 이야기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물리학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그걸 안다.

근데 비유로서, 잠깐이지만, 뭔가가 보였다.

내가 여기 있기까지, 가능한 모든 경로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을 경로.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경로. 증조할아버지가 이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로 갔을 경로. 그 경로들 모두에서 나는 없다.

그리고 이 경로에서 나는 있다.

빛의 경로처럼, 나는 수많은 소거 끝에 남은 경로다.

그 소거들 중 많은 것은 전쟁이었다. 기근이었다. 병이었다.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소거들이 쌓인 끝에, 두부를 좋아하고 물리학을 공부하고 지수 앞에서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말하는 내가 있다.

수업이 끝났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밖에 봄 빛이 있었다.

빛은 오늘도 가능한 모든 경로를 탐색하고, 내 눈까지 왔다.


13.

지수가 어머니를 만났다.

정확히는, 어머니를 찾았다.

학기 중에 갑자기 말했다.

"찾았어."

"누구를?"

"우리 엄마."

나는 말없이 지수를 봤다.

"연락은 안 했어. 찾기만 했어. 어디 사는지."

"어디 살아?"

"부산."

"가볼 거야?"

지수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아직."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지수가 말했다, "사진을 봤어. 같은 친구 SNS에 올라온 사진. 어머니가."

"어때?"

"나랑 눈이 똑같았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뭔가가 조여드는 걸 느꼈다. 가슴 한쪽에서, 아주 작게.

눈이 똑같았어.

배운 것도 아니고,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눈이 똑같았다.


나는 그날 밤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빠, 나야."

"어, 무슨 일이야?"

"그냥. 별일 없어요."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밥은 먹었어?"

"응."

"뭐 먹었어?"

"두부."

아버지가 웃는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로도 알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잠깐 같은 시간 안에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두부를 한 조각 더 먹었다.


14.

수학 선배가 드디어 졸업했다.

5년 만이었다.

졸업식 날, 나는 선배가 부모님과 함께 있는 걸 봤다. 어머니는 선배랑 눈이 똑같았다. 아버지는 선배와 서 있는 자세가 똑같았다. 한쪽 어깨가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자세.

선배는 그게 자신의 자세인 줄 알고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자신이 된다.

나는 졸업식장 구석에서 이 생각을 했다.

지수가 옆에 있었다.

"수학 선배, 드디어 졸업했네."

"응."

"논문은 어떻게 됐어?"

"어딘가에 제출했다고 했어. 학부 논문으로는 안 됐는데, 온라인 저널에."

"실렸어?"

"모르겠어. 아직 보류 상태라고."

지수가 선배를 봤다.

"근데 그 논문 제목이 뭐였어?"

"경로적분과 생물학적 기억."

지수가 잠깐 생각했다.

"그거..." 지수가 말했다. "그거 맞는 것 같아."

"응?"

"유전자가 경로적분처럼 작동한다는 거. 맞는 것 같아."

나는 지수를 봤다.

"이유는?"

"눈이 똑같으니까."

나는 알아들었다.

지수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만날지 안 만날지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근데 눈이 똑같았다. 그 똑같음이, 시간과 거리와 만남 없이도, 이어져 있었다.

빛처럼. 관측하기 전에 이미 경로 위에 있는 것처럼.


5부: 잔상

15.

그해 여름이 돌아왔다.

정확히 1년이 지났다. 내가 두부를 먹으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낀 그 여름으로부터.

아버지는 완전히 회복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두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거미는 오늘도 베란다 어딘가에서 집을 지을 것이다.

지수는 결국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혼자.

갔다가 돌아왔는데,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지수가 말한 건 한 가지였다.

"매운 걸 안 좋아하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충분했다.


16.

수학 선배의 논문은 결국 어떤 저널에도 실리지 않았다.

선배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회사에 취직했다.

어디에?

치과 의료기기 회사.

나는 이 사실을 들었을 때 왜인지 웃음이 났다.

"부모님이 치과의사잖아요."

"응."

"그거랑 관계 있어요?"

수학 선배가 생각했다.

"관계가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싫어요?"

"아니." 선배가 말했다. "이상하게도 아니야. 처음에는 이상했어. 내가 선택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근데..."

선배가 잠깐 멈췄다.

"빛도 경로를 선택하지 않잖아. 그게 빛의 경로가 아닌 건 아니잖아."

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자신의 말인지, 내가 선배에게 처음 한 말인지, 선배가 먼저 한 말인지, 어디서 시작된 건지 이제 구분이 안 됐다.

그게 또 이상하게 좋았다.


17.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해 여름 끝에, 나는 수업에서 이중슬릿 실험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을 들었다.

교수가 말했다.

"관측이 일어나는 순간, 중첩이 붕괴된다. 입자는 하나의 경로를 선택한다. 하지만."

교수가 잠깐 멈췄다.

"그 붕괴는 단순히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야. 다른 경로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합산된 확률이 하나로 수렴하는 거야. 다른 가능성들이 지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현실로 응집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적으면서 멈췄다.

다른 가능성들이 지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현실로 응집되는 것.

그 현실 안에 모든 가능성이 들어와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안에, 내가 없었을 모든 경로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견딘 것. 지수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눈. 수학 선배가 치과 기기 회사에 취직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현실로 응집된 것 안에 있다.

나는 노트를 닫았다.


18.

그날 저녁.

나는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냈다.

간장을 꺼냈다.

두부 한 조각을 집어서 간장에 찍었다.

먹었다.

맛있었다.

창밖에 여름 저녁 빛이 있었다. 아직 환한 7월의 저녁이었다. 빛은 창문을 통과할 때 약간 굴절됐다. 가능한 모든 경로를 이미 탐색한 빛이, 지금 내 방 안에 있었다.

나는 두부를 한 조각 더 집었다.

할아버지가 두부 앞에서 운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배운 적 없는 것을 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지수의 어머니 눈과 지수의 눈이 같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결론 내리지 않기로 했다.

결론을 내리는 대신, 두부를 먹기로 했다.

이것이 경로의 현재다.

가능한 모든 과거들이 응집된 이 한 점.

간장의 짠맛이 혀에 퍼졌다.

두부의 부드러움이 잇몸 사이에서 무너졌다.

빛이 방 안에 있었다.

나는 여기 있었다.


에필로그: 거미에게

베란다에 다시 거미가 왔다.

이 거미가 지난해 베란다에 왔던 거미의 자손인지 알 수 없다. 거미의 일생은 짧다. 어쩌면 이미 여러 세대가 지났을 것이다.

거미는 오늘도 집을 짓고 있었다.

각도는 어제와 같았다. 작년과 같았다. 수백만 년 전의 거미와 같았다.

나는 그 거미를 한동안 봤다.

거미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했다.

빛이 거미줄에 닿았다. 미세하게 굴절됐다. 무지개빛이 잠깐 거미줄에서 번쩍였다.

가능한 모든 경로를 탐색하는 빛이, 수백만 년의 탐색으로 만들어진 거미줄에 닿아서, 잠깐 무지개가 되었다.

나는 이 문장을 노트에 쓰지 않았다.

그냥 봤다.

거미는 계속 일했다.

빛은 계속 통과했다.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


끝.


작가 후기: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꾸 멈췄다. 어떤 장면에서는 설명을 더 하고 싶었고, 어떤 문장에서는 더 화려하게 쓰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거미를 생각했다. 거미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짓는다. 수백만 년 전부터 내려온 방식대로. 나는 이 소설이 거미집처럼 되기를 바랐다. 각도는 전통이고, 실은 감각이고, 집 전체가 당신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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